Written by 4:27 오후 130호(2022.10)

선구자 인터뷰
(사)민주‧인권‧평화를 실천하는 긴급조치사람들 김명식 사무처장

7년만에 바로잡힌 판결. “긴급조치9호의 불법성”

(사)민주‧인권‧평화를 실천하는 긴급조치사람들 김명식 사무처장

임세진 선구자 편집위원

지난 8월 30일 대법원에서 긴급조치 발령의 불법성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가 진행됐다.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체포, 기소되고 나아가 유죄판결을 선고받아 형을 복역한 피해자들 및 그 가족들에 대해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며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2006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긴급조치를 ‘불법적 국가폭력’으로 규정했다. 이후 대법원은 2010년~2013년에 긴급조치 1·4·9호에 대해 ‘위헌·무효’ 판결을 내렸다. 헌법재판소도 2013년 긴급조치 1·2·9호를 위헌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시절(2014~2015년) 양승태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고도의 정치 행위”라며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 제9호 발령 및 적용·집행행위가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에서 말하는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아 국가배상책임을 부정한 것이다. 이러한 대법원의 판결을 7년여 만에 바로 잡은 것이다.

이로 인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은 국가배상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법농단으로 인해 2015년 대법원 판례로 이미 패소가 확정된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는 여전히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판결이 나오기까지 활동을 이어온 (사)민주‧인권‧평화를 실천하는 긴급조치사람들(이하 ‘긴급조치사람들’) 김명식 사무처장을 만나 그간의 활동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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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긴급조치사람들’ 발족 취지와 활동에 대해 물었다.
“‘긴급조치사람들’은 2018년도에 창립이 됐습니다. 단기적으로 긴급 조치 관련자들의 친선 도모와 권익 보호, 권리 회복을 도모하고 장기적으로는 대외적인 공익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2010년 12월 ‘긴급조치 9호 등 재심대책위원회’구성을 시작으로 활동을 이어오다가 2018년에 사단법인으로 등록됐죠.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게 되면 나오는 형사 보상금의 일부를 기금으로 출연해 재단법인을 구성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2014년도, 2015년도 대법원 판례 때문에 줄줄이 다 패소하면서 차질이 많이 생겼죠.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일부 참여자들이 형사 보상금의 5%씩 출연해서 사단법인을 만들었습니다. 재판이 잘 돼서 배상이 이루어지게 되면 자금도 풍부해지고 그러면 명실상부하게 민주, 인권, 평화 등등 거시적인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현재는 재판이 끝나지 않은 상태인데 본인의 재판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재판 정보를 입수해서 내용을 알려드리고 재판이 잘 되도록 법률 지원을 하고 있는데, 제가 그 일을 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방에 있다 보니까 크게 활동을 하지는 못합니다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료를 검색해서 재판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그때그때 정리해서 정보를 공유하는 거죠. 누구는 상고기관에 가서 소를 넣고, 원고 일부 승했고 이런 식으로 재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면 자신의 재판은 어떻게 될지 예측이 되니까요. 학식이 있어도 재판에 관한 건 잘 모르고 관심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제가 알려드리는 일을 주로 하고 있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상담도 해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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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재판 정보 수집

재판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수집하는 걸까?

“제가 처음에 할 때는 법률 신문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법률신문에 나오는 신문 기사에는 그 사건 번호가 나와요. 그걸 보고 적어놓는 거죠. 또 법원 홈페이지에 비실명으로 나와 있는 그런 자료가 있고요. 또 아는 사람을 통해서 물어보기도 하고, 그다음에 누가 전화가 오면 사건 번호를 물어요. 자기 사건 번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예요. 그러면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해서 알려달라고 해서 적어놓고, 그런 식으로 한 겁니다. 며칠 전에도 제가 두 건을 건졌거든요. 모르던 사건 번호를 알게 되는 경우를 저는 ‘건졌다’라고 표현합니다. 근데 아직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이보다 더 돼요. 실제는 훨씬 더 돼요. 계속 파악하고 있는 거죠.

예전 신문을 참조하기도 합니다. 1980년 2월 28일 조선일보를 보면 사면복권된 학생 명단이 나옵니다. 687명이 이제 복학을 하게 되죠. 조선일보의 뉴스 라이브러리를 보면 나옵니다. 명단이 중요하니까 그걸 다 이렇게 복사해서 붙여놓는 거죠. 그리고 긴급 조치가 해제된 게 79년 12월 8일이었는데 그때 이제 석방된 사람들 68명의 명단과 신분이 다 나와요. 학교, 학과, 목사님, 신부님 등등. 그다음에 11일 후에 풀린 사람들 604명 명단. 이걸 다 취합하고 있는 거죠.”

시작은 내 사건 해결을 위한 참고 조사

현재 무려 426명의 재판 정보를 파악하고 있다. 패소자 196명, 승소자 51명, 현재 재판 진행자 그럼 179명이다.

법을 전공하신 거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아뇨.”라고 답한다. 그러면 2018년에 사단법인 만들기 이전부터 함께 활동을 하시는 거냐는 질문에도 아니라고 답한다. 그럼 이렇게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물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했죠. 제 사건이 여기에 들어있기 때문에. 저도 학교 다닐 때 긴급조치 위반으로 1년 가까이 살았죠. 그래서 재판을 하고 이런 과정에서 민사소송을 했고요. 소송을 하려면 소송 당사자가 환하게 알아야 되거든요. 변호사는 그냥 옆에서 지원해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하다 보니까 남의 사건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 거죠. 다른 사람 사건이 어떻게 되는지 보면 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자꾸 이제 딴 사람들 사건에 관심을 갖는 거죠. 사건 번호를 물어보고 검색해서 어느 정도까지 진행이 됐는지 이런 걸 조금씩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한 거죠. 그런 식으로 하다 보니까 계속 이게 늘어나가지고 이제 이렇게 된 거죠.(웃음) 그러면서 제 사건은 뒷전이고 다른 사람 사건에 더 관심을 갖고 재판 정보를 단톡방에 올리고, 어느 시점에서는 제가 연구한 것을 발표도 하고 하다 보니 ‘긴급조치사람들’에서 연락이 왔어요. ‘사무처장을 좀 해봐라’ 이렇게 된 거죠.”

김명식 사무처장은 인하대 재학 당시 서클 ‘지성’ 회원으로 78년 10월 17일에 실행된 유인물 배포사건으로 구속, 수감됐다. 2학년이었던 김명식 사무처장은 과 친구 2명과 함께 ‘인하인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와 ‘양심선언’이란 제목으로 선언문을 작성,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들이 작성한 유인물은 ‘유신헌법 하에 시행된 대통령 선거는 무효다. 학원 자율화 보장하라’, ‘유신헌법은 일개인의 영구집권을 위한 독재정치 체제이다. 유신체제를 폐지하고 민주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자’는 내용을 싣고 있었다.

“저는 78년 10월에 유인물 배포를 하고 활동을 하던 중 잡혔어요. 잡혀 들어가서 재판을 받고 1년 가까이 징역을 살고 나와서 80년대에 복학을 하고 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을 했죠. 77학번이고요. 복학한 후로 그냥 평온하게 살았습니다. 더 이상 뭐 이런 활동 안 하고 직장에 들어가서 직장생활 하고 가정생활만 하다가 이걸 함으로 해가지고 이제 다시 만나게 된 거죠. 우리 유영태 이사장님과 긴급조치 사람들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저보다 선배고 그 당시에 이제 그 감옥 생활을 다 하셨던 분인데 수십 년 만에 보게 된 거죠.”

직장생활과 가정생활만 했다고 하지만, 사회문제에 아예 눈과 귀를 닫은 것은 아니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2006년도에 나온 과거사 결정문을 보고 언젠가 진실규명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2013년 헌법재판소에서 긴급조치 1, 2, 9호에 위헌판결을 내리는 것을 보고 재판을 진행했다.

36년 만에 받은 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9년째 계류 중인 손해배상 청구

“민사재판을 2013년에 했습니다. 2013년 3월 21일에 헌법재판소에서 긴급조치 1호, 2호, 9호가 전부 위헌, 무효다. 이렇게 결정이 났잖아요. 결정이 났으면 재심 사유가 되는 겁니다. 재심을 할 수가 있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재심 신청을 한 거죠. 그래서 전부 무죄를 받았죠. 저는 9월 5일이 제 생일인데 9월 5일 날 서울고등법원에 가서 판사가 ‘무죄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러고 그렇게 판결을 받았죠. 그렇게 되면 이제 민사 소송에서 재판을, 징역을 받은 게 원인무효가 되잖아요. 그러면 이제 형사보상 신청을 할 수 있죠. 형사보상금을 수령을 하고 그다음에 그거는 이제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손해배상 소송을 하는 거죠. 그해 9월에 시작해서 지금 만 9년이 넘었잖아요? 지금 아직도 대법원에서 계류돼 있습니다.”

취미로 하는 거죠.

길고 긴 싸움. 끝이 보이지 않는 날이 더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힘들지는 않은지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예상 밖이다. ‘취미로 한다’는 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취미 중에 하나가 뉴스라이브러리로 옛날 신문, 일제 시대 신문 보는 거예요.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가나 항일운동가들에 대한 기사 보는 게 취미였어요. 그런 습관이 이런 것하고 다 연계가 돼요. 다른 사람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취미죠. 몇 년 전에 그 당시 사무처장으로 있던 분이 저한테 묻더라고요. “이런 걸 어떻게 하냐”고 내가 “취미로 합니다.” 그랬더니 웃더라구요. 나는 진심으로 얘기한 거예요. 그랬는데 그 사람은 못 믿는 거예요. 나는 진짜 재미로 하는 거거든요. 재미로 해야지 이거, 재미로 안 하면 하겠습니까?”

그런 취미를 반영하듯, 기자의 방문에 맞춰 검색하고 프린트한 기사들을 보여준다. 김기사에서 인터뷰를 간다고 하니 과거 기사를 찾아 농대 출신들을 다 찾아 세어봤다고 한다.

“오신다는 얘기 듣고 내가 옛날 신문을 검색해 봤거든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 검색을 해보니까 아, 진짜…. 연일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계속되고 김상진열사 추모 그 끝에 결국은 9호를 발령했고 잠잠해지니까 5월 22일 날 들고일어난 거죠. 그때 구속된 사람이 엄청 많습니다. 그리고 오래 징역을 오래 살았고…. 여기(동아일보 신문기사)에 1980년도 신학기 때 각 대학 복학 대상자 명단이 다 있잖아요. 서울대가 296명이죠. 74년도 75년도 쭉 있는데 농대생이 20명이더라고요. 확인해 보니까 주로 이제 75년도에 오둘둘 사건 때 대거 제명이 됐거든요. 농대생이 그때 좀 많았고 그다음에 78년도에 한 일곱 분 정도가 있더라고요. 농대생이. 그분들 재판이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시로 검색해서 정리하는 재판 진행 상황

단톡방에는 어떤 분들이 모여 어떤 정보를 공유하는지 물었다.

“그게 이제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재판이 다 끝나서 승소한 사람이 있을 거고, 그다음에 재판이 끝나서 패소한 사람이 있을 거 아니요. 그다음에 또 진행되고 있는 사람, 그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세 가지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다 들어와 있죠. 물론 전부 다는 아니죠. 관심 없어서 안 하는 사람도 있고요. 단톡방에는 204명이 있는데 대부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입니다. 사건 번호가 있으니까 수시로 검색을 해 보죠. 하급심의 변론 재개 및 선고. 23건의 본인이 91명인데 그동안에 재판이 중단됐다가 8월 31일 이후에 변론이 재개 됐거든요. 1심에서는 10월 13일 날 누구 뭐…. 변론일이 11월 11일, 판결 선고 12월 8일 있고, 2심은 언제고. 심** 56년생 장** 외 4명 이렇게 재판이 일정이 잡혀 있거든요. 이런 식으로 알려주는 거죠. 알려주면은 ‘아, 이제 이 재판이 진행되는구나. 그럼 우리 재판도 진행되겠지’하고 준비를 하게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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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머물러 있는 생활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어려운 점은 없는지 물었다.
“이제 습관이 되다 보니, 한 몇 년 동안 하다 보니까 이제 많이 간단합니다.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거죠. 과거에. 이제 앞으로 나가야 되는데 계속 뒤에 있는 그런 느낌. 늘, 맨날 이런 걸 보니까 생산적이지 못하잖아요. 물론 재판에 승소를 하면 배상금이 나오죠. 그런 측면에서는 생산성이 있다고 보는데, 다른 사람들 것까지 다 봐야 되기 때문에 늘 과거에 매달려 있죠. 낯선 이름이 나오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검색을 해 봅니다. 관련된 신문 기사가 있는지. 안 나오는 사람도 많지만 조금 이름 있는 사람들은 나오잖아요. 그럼 이제 다 읽어보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과거에 머물러 있다라는 게 제일 큰일이에요. 계속 이러다 보니까 누가 뭐라고 그러면 바로 답이 나오죠. 신문사에서 취재 요청이 오면 제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거든요. 취재 요청 전화가 오면 그 사람이 원하는 자료의 120% 이상을 주는 거죠. 그래 하다 보니까 ‘아, 계속 이래 가지고 이게 좀 곤란한데…. 그래 이제 빨리 좀 마무리를 짓고 손을 좀 털고 싶은데…’하는 마음이 들죠. 그런 각도에서 8월 30일 전원합의체 판결이 아주 시의적절한 거죠. 저를 도와주는 거니까. 안 그러면 또 계속 가야 돼”(웃음)

최선을 다한후 얻는 보람

모든 재판을 아우르고 있는 그이기에 전원합의체 판결 당시 소감이 남다르셨을 것 같았다는 질문에 떠오르는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그렇죠. 덕분에 대법정도 가봤죠. 대법원 대법정이 우리나라에 참 권위 있는 그런 장이잖아요. 다 같이 가서 대법관들 판결을 들었는데 이런 생각이 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이런 걸 안 해봤기 때문에 잘 모르는데 저는 계속 검색을 해서 이게 어떻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거다, 이런 걸 이제 예측을 할 수 있어요. 어떤 사례가 있었냐면, 어떤 사람이 1심에서 졌어요. 그러니 이제 2심은 하나마나 진다, 이렇게 본 거죠. 그 당시 그런 판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저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대구에 사는 사람이라 만나서 얘기를 다 들어봤죠. 이야기를 들어보고 ‘이렇게 패배 의식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기든 지든 최선을 다해서 해보자,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서류를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줬죠. 진술서는 어떻게 쓰고, 원고 발언은 어떻게 하고, 내용도 좀 적어주고 그러니까 2심에서 이겼잖아요. 이 사람이 2심에서 승소를 했고 대법원에서도 승소를 했죠. 변호사들도 다 포기한 상태였는데 결국 이겼죠. 패배 의식에 젖어 있으면 지게 돼 있습니다. 져도 끝까지 한 번 해보고 지면은 여한이 없잖아요. 그런 자세로, 변호사도 거의 패색이 짙다고 했던 부분을 최선을 다해서 하니 승소하는 일도 있어요. 그러면 굉장히 보람이 있죠. 개인적으로 상담 연락이 많이 오고, 연락이 오면 만나보기도 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은 전화로 얘기를 들어보고 하죠.”

남들이 다 안될 거라고 하는 사건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때 승소를 이끌어 내며 그 경험과 희망으로 긴급조치 피해자를 독려한 끝에 8월 30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맞이한 소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만큼 노력도 끝이 없었음이 느껴졌다. 스트레스는 없는지 물었다.

“저는 철저하게 비전문가입니다. 이런 거에 문외한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렇게 깊이 빠졌죠. 하지만 스트레스는 안 받아요. 왜냐하면 일인자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변호사들도 자기 사건에 대해서만 알거든요. 전체적인 걸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서 오는 자부심. 그런 게 있기 때문에 하지 그런 거라도 없으면 못하겠죠.(웃음) 그다음에 무언가 필요한 사람에게 연락이 오면 바로바로 답을 줄 수 있다는 거. 그 사람이 궁금해하는 거 어지간한 건 다 답변이 되니까. 정 안 되는 거는 제가 변호사한테 물어봐가지고 그다음 날이라도 알려주고 있어요. 그런 부분이 보람 있죠.”

개인적으로 희망을 갖고 시작한 작업, 데이터 베이스가 되다

“저한테는 이런 이 작업이 굉장히 이게 소중한 작업입니다. 거의 한 10년 이상 제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나온 과거사에 대한 결정문, 이런 걸 많이 봤어요. 당시에는 긴급 조치 사건에 대한 재판이 이제 구체화되기 전인데 그 내용을 계속 읽어보면서 ‘우리 사건도 언젠가는 진실 규명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죠. 그런 걸 많이 봐 오다 보니까 이런 데로 관심을 갖게 되었고요. 과거사에 대한 진실 규명이 밝혀지고 재심을 해서 무죄를 받고 민사소송을 해서 금전적인 보상이 이루어져야 그게 이제 진실 규명이 된 거거든요. 그냥 말로만 ‘무죄’ 해가지고는 안 되는 거죠. 단순히 돈을 원하는 게 아니고, 배상까지 이뤄져야 끝납니다. 그런 작업의 일환으로 제가 여기에 포함이 돼 있고,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사람들한테 정보를 제공해 주고 한다는 게 굉장히 보람이 있죠. 이거는 ‘긴급조치사람들’ 사무처장 자격으로 한다기보다는 제 개인적으로 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하다 보니까 ‘그럼 니가 사무처장 해라’ 이래 된 거죠. 개인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보람을 느끼고 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다는데 주안점을 갖고 있습니다.”

‘긴급조치사람들’ 홈페이지도 만들고 있다. 김명식 사무처장은 ‘법률지원’ 코너를 채우고 있다.

원사건과 재심사건을 분류하여 이름, 사건 번호, 사건분류(원사건, 재심), 법원(지방법원 1심, 고등법원 2심, 대법원), 선고일, 재판부, 법원명, 원고, 결과, 기타로 항목을 구분하여 내용을 채워넣는 것이다. 사건 번호나 이름을 치면 관련사건까지 조회되는 시스템이다.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검색시스템으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형사(원사건)은 엑셀 파일을 입수하여 입력시켰어요. 파일에 있는 내용을 붙여 넣으면 되는 거라 아르바이트를 시켰죠. 민사(재심사건)은 제가 했어요. 민사는 내용을 아는 사람이 해야 되니까 제가 하나하나 내용을 채웠죠.”

보통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많이 바쁘지는 않은지 건강은 어떤지 물었다.
“많이 바쁜 건 아니고, 그냥 심심하지 않을 정도, 그 정도입니다. 건강은 몰라요, 확실한 건 알 수가 없잖아요. 건강은 장담을 못하니까.”(웃음)

마른 몸이지만 강단 있는 모습에 환한 웃음을 보니 건강함이 느껴졌다.

재판과 입법 두 마리 토끼 잡기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재판에 집중을 해서 최대한 사람들을 참여시키고, 후원금을 좀 확대해가지고 공익적인 활동을 해야 되겠죠. 일단은 재판이 남은 경우는 앞으로 승소를 할 것이니 문제가 안되죠. 문제는 패소한 196명이예요. 이 사람들은 이제 정말 구제할 방법이 없어요. 다시 재심할 수도 없고….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어가지고 재판을 다시 받도록 해준다든가 아니면 여기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준다든가 하는 법을 입법을 해야 됩니다. 심지어 같은 사건에 다른 결과가 나온 경우도 많습니다.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긴급 조치 발동 1호 구속자거든요. 백기완 선생은 재판을 쭉 진행해서 2015년에 민사소송에서 패소가 확정됐고 장준하 선생은 재판이 지연됐다가 2013년도에 1심 선고했고 지금 10월 13일 2심 선고가 있거든요. 이거는 이제 거의 승소가 확정적이예요. 똑같은 건데 백기완 선생은 완전히 져버리고 장준하 선생은 이기고 그게 말이 되느냐, 그런 내용을 언론사 기자에게 보내줬죠. 현재 재판장의 과거 사건, 과거 재판장의 이력도 함께 보냈어요.

입법 투쟁, 입법 활동을 계속 해야죠. 재판과 입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되는데 시일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지금 국회의원들을 보면 ‘과연 저런 사람들한테 우리 권리회복을 요구를 해야 되나, 저 사람들이 우리 권리 회복을 해 줄 수 있겠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의문 들지만 어쩔 수 없죠.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그게 빨리 좀 진행이 됐으면 좋겠고 이분들도 다 재판을 다시 받아가지고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그게 이제 원하는 바이죠.”

오랜 시간 활동을 이어오며 재판 내용을 정리하고, 개인 생각을 정리한 글이 무수히 많다. •긴급조치 사건 대법원 전원합의체 심리개시에 즈음한 개인 성명서 (2020. 12. 16), •긴급조치9호 소송 약사- 긴급조치 관련 주요 결정 및 판결:2010년부터 2021년까지(2022. 06. 27), •대법원 전합 심리 종결 및 판결선고 임박 (2022. 07. 21), •판례변경시 패소 확정자에 대한 재심 인정 가능성에 대하여(2022. 08. 26), •미쓰비시 현금화 재판과 긴급조치 재판(2022. 08. 30) 등 단톡방에 올린 글 중 주옥같은 글들을 추려 카톡 모음 100선을 소책자로 발행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유영표 이사장과 함께

김상진열사와의 인연

더불어 김상진열사와의 인연도 밝힌다.
“81년에 우리 학교 선배님이 김상진열사 여동생하고 연락이 돼서 묘소를 같이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민주화 운동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신 열사를 뵈었죠. 그 이후 김상진열사 기념사업회가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활동하는 줄은 몰랐는데 이번에 알게 됐죠. 작년 5월에 서울에 올라가서 회의를 하고 내려왔는데 며칠 후에 유영표 이사장님이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오돌돌 선배님들. 김상진기념사업회”라고 쓰인 현수막 앞에서 김상진기념사업회 분들과 찍은 사진을 보내왔어요. 이런 모임을 가졌다고. 그러기에 다들 참 존경스럽다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홈페이지를 보니까 굉장히 활동을 많이 하시고 굉장히 잘 돼 있는 것 같습니다. 참 존경스럽고 김상진 열사의 뜻을 아직까지 잊지않고 그렇게 해준다는데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패소자에 대한 보상까지 다 이뤄지고 나면 소박하게 건강 관리하면서 여가활동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김명식 사무처장의 모습을 보며, 몸도 마음도 건강히,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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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진 _ 숭의여전 문창과에 입학, 문예창작보다 학보사 기사를 더 열심히 쓰고, 졸업 후 전국연합 기관지 ‘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신문 ‘건치신문’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후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하고 KOICA 봉사단을 다녀온 후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인터뷰하고있다. (sejin3025@hanmail.net)

Last modified: 202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