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정치를 함께하는 군의원이 되겠습니다.”
송윤섭(원예 83)
임세진 선구자 편집위원
<편집자 주> 옥천군의회 사상 첫 진보당 출신 군의원이 탄생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송윤섭 당선인은 28.15%를 얻어 5명 중 당당히 1위를 하는 쾌거를 이루며 도내에서 유일한 제3정당 후보로 의회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옥천으로 귀농해 32년간 농민회 활동과 지역의 활동을 도맡아 해온 송윤섭 회원을 만났다.
예상치 못한 당선, 그 배경은 농촌 실정의 어려움
먼저 당선 소감을 들었다.
“사실 선거 준비를 할 때도 당선까지는 예상을 못했어요. 그동안 지역에서 여러 가지 활동들을 했으니까 처음이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라는 가늠은 했어도 이렇게 덜컥 당선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죠. 어르신들, 특히나 농촌에 있는 어르신들한테는 진보당이라는 게 굉장히 낯설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당 후보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제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 그동안 활동해 온 것에 대한 평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농촌 실정이 진짜 어렵다. 뭔가 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는 심정에서 낯선 당, 낯선 후보한테 표를 줬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진보당의 당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짜 생활 정치를 하고 싶어요. 농촌에서 살면서 특히나 기초 단위의 살림살이는 소소한 것을 챙기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면 단위에서 해왔던 활동들을 좀 더 확장해서 합법적인 공간에서 정책을 만들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32년간 이루어놓은 면 단위 자치활동과 경제공동체
외지인으로 옥천으로 내려가 농민회를 만들고 면 단위 활동들을 하면서 ‘농민회’는 투쟁하는 조직이라는 이미지로 두루두루 관계 맺기가 어려웠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자치활동을 고민하고 면 단위에서, 군 단위의 행정과 통로를 만들고 지역 공동체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먹고사는 문제, 자립의 문제를 최우선으로 활동하면서 공감과 지지가 늘어났다.
고추씨 공동구매사업, 고추판매사업, 대학생 농촌활동, 고추 작목반 조직, 과채 작목반 ‘한우리’ 결성, 안남어머니학교 교장, 지역발전위원회 결성, 배바우장터 복원, 배바우마을신문 창간, 배바우도농교류센터 설립, 옥천군 농업발전위원회 조례 제정 촉구, 옥천군 학교급식조례 제정 촉구, 학교 급식 직접 실행 주체인 옥천살림영농조합 설립, 안남배바우작은도서관 운영위원, 옥천희망연대 창설, 청호환경농민연대 창립, 안남면태양광반대대책위원회 활동 등등 그의 활동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중 송윤섭 의원이 가장 손에 꼽는 것이 ‘어머니 학교’와 경제공동체 구성이다.
“기본적인 주민자치 활동으로 성인 문해교육, 즉 ‘어머니 학교’ 활동을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게 결국은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건데 농촌 여성분들이 진짜 삼중고(三重苦), 사중고(四重苦)에 시달리며 사시거든요. 그분들이 제일 힘들어 하는 것이 문자를 모르는 거예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안남면에 어머니 학교를 만들어서 지금까지 20년 정도 끌고 왔는데 이 일이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보람 있었고 지역을 활성화시켜내고 공감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큰 계기가 됐죠.”
어머니 학교는 단순히 한글만 가르치는 한글교실이 아니라 학생회나 교사회를 구성하여 자치 문화를 만들어 가도록 유도했다. 어머니 들은 스스로 기획해 소풍도 가고 학예회도 열었다.
“다음으로 주민주도의 자치기구로 경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안남면이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할까를 고민한거죠. 안남면은 옥천의 9개 읍면 가운데 가장 작은 면이에요. 지역 공동체 유지를 위해 지역발전위원회라는 논의기구, 주민 주도의 자치기구를 만들어서 안남면 중장기 발전 계획으로 ‘먹고사는 자립의 근거를 만드는 일을 우선적으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죠.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방법은 규모화와 새로운 소득 작물로 변환 등인데, 그런 것은 저희가 살고 있는 농촌 구성원들의 연령이나 경험치들로 봤을 때 현실성이 없어요. 익숙한 방식의 농사, 익숙한 작물을 유지하며 생업 전선을 지키는 방법을 고민했죠. 소규모 형태의 다품목 농사를 유지하면서 판매 방식을 바꿔내는 것, 대안 형태의 소비처들을 확보하는 방안들을 만들어냈죠. 나아가 소비하는 사람과 관계를 만들어내는 로컬푸드 방식으로 생산 체계를 만들어서 자립 기반을 만들어 보자는 기조가 안남면 경제활동의 기본 축으로 논의됐죠. 로컬푸드 생산 방식을 교육하고, 조직하고, 판매하는 일들을 하도록 경제공동체 배바우공동체 협동조합법인을 만들어서 활동했습니다.
아울러 옥천군에 계속 제안을 해서 결국은 조례들이 만들어졌죠. 학교 급식 지원 조례도 만들어서 로컬푸드 방식으로 생산된 친환경 옥천 푸드가 공공급식 채널을 통해서 소비되도록 하고 직매장을 만들어서 판매되도록 해서 지금은 어느 정도 기반들이 작동되고 있는 상황이죠.”
농민회에서 선택한 진보당, 선거에 짐이 되다.
진보당은 전농의 정치적 입장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옥천군 농민회는 농민들한테 진보당을 권유하고, 농민회 회원들도 직접 참여하자고 결론을 냈는데 문제는 ‘누가 권유 당사자가 될 것인가’였다. 옥천군 농민회 32년의 역사를 만들어낸 산 증인 송윤섭 의원이 총대를 메게됐다.
“진보당은 제가 속해있는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의 정치적 입장이예요. 옥천군 농민회에서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대중조직 기반과 활동력이 저하되는 상황에서 농민 권익 활동들을 지역 정치판에서 풀어내야 한다는 고민 끝에 결정을 하게 된 거죠.
하지만 선거를 치러내는 과정 속에서 진보당은 진짜 짐이었어요. 경로당과 마을을 돌면서 제가 살아온 얘기, 제가 생각하는 농촌의 대안적인 모습들을 설명하면 많이 수긍을 해요. ‘아이고, 선출직 중에 이렇게 상세한 얘기를 하는 사람도 처음 봤네, 이렇게 일할만한 사람이 일을 해야지.’ 그렇게 동의를 하시고는 그 다음에 하는 말이 ‘그래서 그 당은 뭐여? 1번이야 2번이야?’ 이렇게 묻는 거죠. ‘진보당으로 나옵니다.’라고 하면 얘기도 안 들어보고 ‘당을 잘 타고 나와야지. 이거 뭐 당선되려고 하는 게 아니네’라고 얘기하는 경우도 많았죠. 심지어 ‘너한테 마음이 가는데 진짜 입이 안 떨어진다. 진보당 소리가 안 나와.’라는 하소연까지 할 만큼 진보당은 굉장한 벽이었죠.”
그동안의 활동과 신뢰로 만들어 진 여론들, 선거 판을 흔들다.
“그런데 일정 정도 시기가 지나 여론이 형성되면서부터는 스스로 대안을 주더라고요. ‘지역 정치판에서는 그거(당) 필요 없어. 진짜 일할만한 사람이 중요하지.’ 그러면서 다른 후보들이 오면 어르신들이 ‘우리 안남면에 후보 있다. 여기는 넘보지 마라.’ 그렇게 방어를 해주고 이게 이제 소문이 쫙 돈 거예요. ‘송윤섭이는 지가 사는 안남면에서 완전히 절대적이다.’ 이런 소문들이 퍼지니까 저를 잘 모르는 면 단위에서도 궁금증을 갖게 됐죠. ‘아니, 안남에서 들리는 소문이 이렇던데….’ 그러면서 관심을 갖고 제가 찾아갔을 때 더 얘기를 해보려고 하는 분들도 늘어났죠.
막판에는 다른 후보들이 틈새 공략을 해오면서 ‘안남이 위태롭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그게 쉽게 정리가 된 게 ‘안남만이 아니라 안내도 소문이 괜찮대, 청산도 소문이 괜찮대, 안남 사람들이 잘 지켜만 주면 유권자가 적어도 송윤섭 당선이 가능하다.’ 이런 여론들이 형성되면서 저희가 해낼 수 없는, 진짜 큰 힘이 선거 기간 동안에 작동이 됐어요.
결국 주민들이 후보에 대한 신뢰, 후보가 지향하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막아내야 될 여론이면 명분을 만들면서 방어를 했고, 그 덕에 선거를 잘 치를 수 있었죠. 그 결과가 득표율 1위. ‘송윤섭이가 여론이 좋다니까 당선될 수도 있겠네.’ 이런 가능성을 가졌던 사람들도 ‘그래도 1등 할 줄은 몰랐다.’고 얘기해요.”
스스로 찾아간 학생 운동, 졸업 후 농민 운동으로 전환
83년도에 원예학과에 입학한 송윤섭 의원은 ‘농촌출신 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입학과 동시에 제 발로 학생 운동 조직을 찾아가 참여했다.’고 말한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경복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입학과 동시에 80년 시절을 겪었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학내에 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입학한 지 며칠도 안 돼서 학내에서 싸움들이 벌어졌고 그런 과정 속에서 학생운동에 대한 갈증으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때 당시(83년도)에 오픈 동아리들이 다시 형성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처음에 과 선배들이 오픈 활동을 권유했는데 뭔가 성에 차지 않아서 학습하는 동아리였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더니 뒷방(?)하고 연결되는 ‘농업발전연구회’, 옛날 한얼 조직하고 연결된 단체에서 활동을 하게 됐죠. 학생 운동을 하던 시기에도 ‘학생회 활동, 과 단위에서 활동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과 대표도 맡았고 단대 과 학생회에서 역할들도 최대한 성실히 하려고 노렸했죠. 그 과정 속에 3학년 되고 농활 추진위원장을 하면서 농민운동으로 전환을 고민했었죠.
군대 갔다 와서 전국농민협회(현 전농의 전신)에서 간사 일을 하다가 지역으로 내려왔어요. 농활 추진위원장을 하면서 충북 쪽에서 연을 맺었던 선배들하고 상의했었죠. 충북 상황 중에서 활동력이 있는 시군도 있었는데 ‘이왕에 평생을 할 거니까 농사일을 배워가면서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조직도 없는 옥천을 선택하고 정착했던 건데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것 같아요.”
귀농하자마자 만든 농민회
“정착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운이 좋았어요. 본래 고향이 전라북도 정읍이었고 부모님도 막판에는 다 서울로 올라온 상태였는데 제가 90년도에 내려와서 한 일 년 정도 농사를 짓고 나서 아버지, 어머니가 내려오셨어요. ‘이놈이 다시 서울로 올 것 같지는 않고 고집 부리면서 계속 살 것 같은데 농사 경험이 있는 내가 가서 거들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셨다고 해요. 부모님이 결합하시고 그다음 해에는 옥천에 있는 처자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가족 구조가 만들어지니 정착에 큰 애로사항은 없었어요.
제가 들어오고 농민회를 만들기위해 소모임을 했어요. 회원들 집을 돌아가면서 회의를 하다 보니까 정보과 형사들이 그 주변을 오고 가고, 이장님 집이 형사들의 임시 거처가 되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경계를 했죠. 심지어 저 때문에 이장하고 면장이 싸웠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옛날에는 주민등록지를 옮기려면 이장 도장을 받아야 됐는데 면장이 이장에게 ‘네가 도장을 찍어 줘서 이렇게 불온한 놈이 안남에 들어오게 됐다.’ 그래서 우리 이장님이 ‘최종적으로 네가 찍어놓고 내 탓을 하냐.’ 이렇게 싸웠다고 하더라구요.”
생활 정치에 나서게 한 농민헌법 제정운동과 태양광 투쟁
생활 정치를 하고 싶다는 송윤섭 의원은 32년간 농민들의 삶과 밀착된 형태의 활동들에 연연하며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활동들이 큰 힘으로 작동되는 보람을 느끼고 이후 행보에 에너지를 갖는 계기가 된 것은 농민헌법 제정 운동과 태양광 투쟁이었다. .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헌법 개헌을 하자, 개헌 속에 농민들의 권익을 위한, 지속 가능한 농업을 만들어내기 위한 농민헌법 내용들을 포함하자는 논의가 있었죠. 농민헌법에 대한 농민들의 반응이 그 어느 때보다 엄청났어요. 서명 운동을 하면서 동의를 구하는데 진짜 눈빛들이 달랐어요. 기대에 차 있었고 적극적으로 호응해주었죠. 그 모습을 보며 새롭게 고민을 하게 됐죠. 농민회가 대중 투쟁도 반드시 해야 되지만 또 다른 행보들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큰 계기였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주민자치를 통해 권리의식들을 갖게 된 활동이 재작년에 마을에서 진행된 태양광 투쟁이었어요. 평소 농민회 활동은 주로 회원들이 동참했죠. 마을 주민들한테 어떤 사안에 대해 동의는 구하지만 ‘그래서 이 투쟁 대열에 동참합시다.’라는 말은 쉽게 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마을에 편법을 통한 태양광 사업이 들어선다고 하니 주민들 전체가 반대 투쟁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90대 할머니들까지도 군청 마당에서 농성하고 도청까지 가서 반대 투쟁을 했죠. ‘충청북도 도민으로 80년, 90년을 살았는데 도청 마당에는 처음 가본다’며 웃으며 참여하는 어르신들과 함께했던 경험이 제일 신났던 것 같아요. 32년 동안 옥천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나랑 일상을 같이 나누는 지역 주민들의 공감을 얻어 대열에 함께하고 결국 이겨내는 과정은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죠. 누구나가 다 패배할 거다, 인허가가 다 난 상태이기 때문에, 옥천군 행정 이래 여태껏 이런 상황에서 주민이 이겨본 적이 없다고 그랬는데 결국은 이겨냈거든요.”
이어지는 고민과 다양한 행동들로 지켜지는 사회, 함께하고 싶은 마음
선구자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니 젊은 시절의 고민과 열정의 끈을 놓지 않고 사는 선후배, 동년배들 덕에 사회가 지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마음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한다.
“제 성격이기도 하지만, 지역에 내려와서 살면서 과 동기 동창들이나 같이 동아리 활동했던 동년배들하고 관계는 거의 없었어요. 처해진 현실이나 고민들이 다르기도 하고 지역에서 거의 앞만 보고 활동하다 보니 소원하게 지냈죠. 카톡방이 있어도 거의 객이었죠. 그런데 제가 새로운 선택을 하면서 소식을 전하니 친구들도 관심을 갖고 옥천으로 격려방문을 와주었어요. 당선되고 나니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며 또 다녀가고 그랬는데, 그냥 소시민처럼 사는 것 같아도 그런 고민들은 계속 하고 사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힘으로 사회가 이렇게라도 버텨내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학교를 벗어난 지 40년 가까이 됐지만 아직까지 현장에서 노력하고 사는 선후배들이 있다는 소식을 선구자를 통해서 듣고 있죠. 스펙트럼이 굉장히 다양해졌는데 그 속에서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역할들을 하고 있는 선배들이나 후배들을 보면서 같이 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게 돼요. 우리 젊은 세대, 학창 시절의 굉장했던 열정들을 계속 되돌아보면서 정의롭게 살기 위해,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역할들을 충실하게 해내는 사람으로 좀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습니다.”
함께하는 정치 만들기, 현장 속에 함께하기
이제 막 시작한 의정활동에서 그가 생각하는 목표는 무엇인지 물었다.
“지금 당장은 내부 조직을 꾸려내는 것을 중점적으로 하려고 해요. 혼자 하기에는 벅차고, 결국은 주민의 힘으로 주민의 목소리를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의정지원단’ 형태를 제안을 했어요. 내가 진보당으로 나왔지만 진보당에서 머무를 생각은 없다, 진짜 생활 정치를 하고 싶으니까 옥천에서 각 군별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의원 지원단으로 결합해서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 여론을 형성하곻고 의제를 모아내는 창구 역할을 해줄 사람들, 조직을 꾸려내자고 제안했고 실행에 옮기려고 하고 있죠. 주민의 뜻과 현실을 반영하는 조직을 만드는 것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답을 찾으려고 해요. 저 나름대로 목표들이 있지만 이게 상대적인 거라서 어떤 주민들은 기대한 만큼 활동이 작동되지 않으면 일반적인 정치에 실망하듯이 ‘역시 믿을 놈은 아무도 없고 정치는 똑같다.’라고 생각할까봐 우려스럽고 그걸 보완하기위해 과정을 중시하려고 합니다. 민원이 발생하면 현장으로 가보고 현장에서 답을 찾으려고 해요. ‘진짜 송윤섭 열심히 한다, 힘에 부쳐서 성사는 못 시키더라도 진짜 노력을 많이 한다.’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실망을 안 하고 또 다른 기대를 할 수 있게 만들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농촌 지역 정치판의 관행을 깨기 위하여
“제 입장에서 당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냐, 뭔가 진짜 주민의 목소리를 제안하면 받지 않겠냐고 생각했죠. 그런데 원 구성 과정에서 ‘국힘 내부적으로 이게 관행이었다’라며 의장부터 다 자기네들끼리 하더라구요. 처음에는 ‘나는 당선되서 일할 기회를 가진 것만으로도 만족해.’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을 보니까 8명 중에 둘만 평의원이고 다 뭔가를 꿰차는 구조인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어차피 농민 쪽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을 할 테니까 산업경제위원장을 하겠다고 입장을 표명했어요. 내부에서 논의하고 제 입장이 고려된 결정들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는데도 깡그리 무시되고 형식적으로 ‘민주당 하고 진보당 셋이서 상의해서 부의장 해 주시고….’라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게 어떤 사안에 있어서는 이렇게 똘똘 뭉치겠구나, 이런 게 직관적으로 와닿았죠. 어찌 됐든 계속 관계 트기를 해야 될 텐데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 중입니다.
이제 농촌 지역 정치판에서도 관행이라는 것들을 좀 많이 깨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이번 선거를 치러내는 과정에서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관행을 깬 거죠. 농촌에서는 아직도 금권 선거나 조직 선거의 작동이 가장 큰 힘이라는 생각이 강한데 그걸 깬 거잖아요. 우리가 작정하고 ‘선거 문화를 바꾸겠다.’ 선언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하는 방식을 보고 ‘진짜 발이 부르트도록 후보가 열심히 다니더라, 유세할 때 선거 운동원들이 함께하는 것들이 참 보기 드문 것들을 봤다.’ 이런 평가들을 하면서 ‘아이고, 당연히 돼야지’라고 호응해주고 당선되고 나니까 ‘역시!’ 이런 얘기들을 했던 건데 그 과정 속에서 지역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만들어내게 된거죠. 굳이 진보당 내에서가 아니라도 활동하는 사람들이 지역에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지역 정치판의 주인으로 나설 수 있는 그런 계기들이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32년이라는 세월동안 한결같이 우직하게 지역민들을 위해 일해온 송윤섭 의원. 지역민들은 그의 행보가 지역정치에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왔음을 알기에 낯선 진보당으로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표를 던졌으리라. 더 큰 판에서 지역 정치, 현실 정치로 주민자치를 이뤄내기 위해 앞으로도 우직하게 길을 걸어갈 송윤섭 의원의 행보가 기대된다.
* 송윤섭 의원의 이메일 주소는 Sanglok22@hanmail.ne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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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진 _ 숭의여전 문창과에 입학, 문예창작보다 학보사 기사를 더 열심히 쓰고, 졸업 후 전국연합 기관지 ‘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신문 ‘건치신문’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후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하고 KOICA 봉사단을 다녀온 후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인터뷰하고있다. (sejin3025@hanmail.net)
Last modified: 202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