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8:13 오후 128호(2022.04)

살아가는 이야기
2022년 봄의 이런저런 이야기

2022년 봄의 이런저런 이야기

이정양 사단법인 농업조사전문가협회장, 농학 86

기껏 3년 정도 서너 페이지의 글을 열 번 정도 쓰고 나니, 단일한 주제로 4페이지 이상의 글을 작성하는 것이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법 스트레스도 쌓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기분 나쁜 스트레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스트레스는 스트레스인지라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 당장 지난 주말에 전북 군산의 형님 집에 가서 오랜만에 형님 내외와 아내와 큰아들, 둘째 아들이 회포를 풀었지만 살짝 뒤가 켕겼고, 다음날 친구의 비료회사에서 식물영양제를 싣고, 이천의 민주화공원에서 김상진 열사 추모식에 참석하였다가도 임세진 편집장위원에게 원고를 보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고흥까지 급히 내려왔답니다. 그렇게 급히 내려와 놓고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만 하다가 내일 해야지 하고 비몽사몽 잠이 들었다가 급히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면 생각이 나겠지 해서 걷다가 생각해 낸 것이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짜깁기해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한 추모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딱히 무엇을 정하지 않고 그냥 걷다가 생각나는 것을 메모해서 몇 자 적어 보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메모를 한 것이 걷기, 코로나와 재신혼 생활, 별지시기, 영양제 장사, 농업조사전문가협회, 마을돌보미활동, 고흥마을대학사회적협동조합 등입니다. 이제부터 생각가는 대로 두드려 보겠습니다.

1. 나에게 걷기란?

사실 이번에는 글쓰기가 막막했습니다. 지난번까지만 해도 얘깃거리가 차고 넘치는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답답해졌습니다. 임세진 편집위원께는 4월 11일에 글을 보내드린다고 하였지만 그 글을 작성하기 위하여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 이 시간은 2022년 4월 12일 오전 12시 47분이랍니다.

어제 아침 7시에 밥을 먹고 걷기를 하기 전까지는 참으로 막연하고 답답하였습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답답함이었습니다. 하지만 40여분 정도 걷다 보니 이런저런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안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번 것은 일도 아닙니다. 두 번의 명퇴와 그 과정에서의 갈등 상황은 저에게 걷기 본능이 없었다면 건강, 경제, 정신적으로 큰 어려움을 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술과 피로에 찌들어서 잠들었기 때문에 잠을 언제 잤는지도 몰랐고, 언제 잠들어야 하는지를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피곤하지 않으니 잠이 잘 오지 않았고, 술에 찌들지 않으니 그냥 자고 싶을 때 자면 되었습니다. 문제는 마음껏 자고 일어났는데 그 시각이 새벽 2시이거나 3시이거나 4시이거나 하였다는 것입니다. 적응하기가 많이 힘들어서 낮에 비몽사몽으로 지내기도 하고, 다시 저녁에는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으니 늦게 잠들고, 어느 날은 재수 좋게 아침까지 푹 잤는데, 대부분은 또 2시, 3시, 4시에 깨는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비가 올 때에 걷기 좋은 4차선 도로 아래 공간

그때부터 무작정 따로 시간 정하지 않고 걷기를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아침에, 낮에, 저녁식사 후에만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새벽 2시에 약수를 떠 오고, 새벽 3시에 읍내 거리 구경하고, 새벽 4시에 시장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무 때나 무작정 걷기를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이 해결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가장 큰 가르침은 저에게 틀이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틀이 약간 느슨해졌다는 것이 맞는 말 같습니다. 틀을 아주 버리거나 부순 것 같지는 않고, 다만 덜 얽매인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입니다.

아무튼 걷기는 저에게 크나큰 자유를 준 것 같습니다. 경제적 자유, 건강상의 자유, 시간적인 자유. 어느 것을 가져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자유를 저에게 가져다준 걷기를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 고마워하며 걷겠습니다.

2. 코로나가 선물한 재신혼 생활

2022년 3월 27일에 고흥에서 서울까지 큰아들과 둘째 아들을 보러 갔습니다. 오래간만에 소주도 한잔하고 자다가 3월 28일 새벽 1시 30분에 잠이 깨어서 그냥 서울을 출발해서 고흥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고 쉬었습니다. 3월 29일 새벽 4시에 출발하여 경북 문경 오미나라에 가서 문성훈이라는 친구를 만나고 경북 안동에서 12시에 다섯 분을 만나서 점심을 함께하였습니다.

문경 오미나라에서 출발하여 안동 시내를 지나는데 왠지 잔기침이 나고 목 안이 간질간질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억지로 약국에 들러서 진단키트를 2개 구입하여 검사를 하니 딱히 문제가 없어서 안동에서 만날 분들께 일단 말씀을 드리고 식사는 같이 하고 헤어져서 다시 고흥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큰 문제는 없었고, 3월 31일 아침에 경남 의령에 갔다가 함양으로 가는데, 왠지 식은땀도 나고, 기침이 나고, 목도 따갑고 하여 함양에서 만날 분께 전화를 하였더니 그분은 1주일 전에 코로나에 확진이 되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또 일단은 만났습니다. 거기에서 충남 부여에서 비료회사를 하는 친구에게 가서 식물영양제를 싣고 태안, 서산에서 사람을 만나서 전해주려던 약속을 취소하고 고흥으로 핸들을 돌렸습니다. 증상이 거의 확실하게 코로나 증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안동에서 구입한 간이 검사 세트로 검사를 해보니, 흐릿한 선이 보여서 그 순간부터는 확진을 기정 사실화하고 고흥군 보건소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보건소에서는 저 위의 골까지 아프게 찔러서 검체를 채취하고 결과는 다음날 8시쯤에 나온다고 했습니다. 혹시 아내는 감염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서 혼자 여관에 가서 잤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아내도 간이 검사를 하였더니 양성이 나왔다고 집으로 오라고 해서 만 하루 만에 재회를 하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저는 8시에 확진 문자를 받고, 아내는 읍내 병원에 가서 신속검사로 확진을 받아서 같은 날 확진이 되었습니다.

감염경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날 또 안 것은 서울에서 만난 큰 아들은 걸리지 않았는데, 둘째 아들도 전날 확진되었다는 것뿐입니다.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고 어디에서 걸렸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생활에 큰 변화가 없었으나, 요양원에 다니는 아내는 기본 격리 1주일에 추가 격리 3일을 더하여 10일간의 격리를 명 받았습니다. 갑작스런 격리조치에 불안해하는 아내를 진정시키고 달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신혼 같은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아내가 주간 근무, 야간 근무, 휴무가 뒤죽박죽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아내와 일상생활은 물론 여가활동도 제대로 못하였는데, 이번 기회에 일상생활도 함께 하고, 운동도 함께 하였습니다. 옛말에 “자빠진 김에 쉬었다 간다.” 하였는데, 저희가 딱 그렇게 10일을 살았습니다. 저도 좋았지만 아내가 간만에 좋아 보였습니다.

“코로나야 고맙다! 니 덕분에 아내가 힐링이 많이 되었단다. 근디 이제는 너 없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디! 언능 꺼져불어라.”

3. 요플레 Flex

아내와의 새로운 신혼을 시작하면서 호사를 누리기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요플레를 원 없이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감염 이전에는 가끔 아내가 마트를 가면 사서 먹었지, 제가 사 먹어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마트엘 가면 저는 가끔 호사를 누린다는 것이 요구르트를 사는 정도였습니다. 요플레는 가끔 행사장에서 얻어먹는 음식으로 알았던 거죠. 그런 제가 매 식사 때마다 2개씩이나 먹다니! 이제는 아내의 입에, 저의 입에 들어가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이것도 코로나 덕분입니다. 예전에도 잘 먹고 잘 살자는 주의였지만 그냥 생각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아프고, 함께 회복하는 과정에서 잘 먹고 잘 살자가 생활화된 것 같습니다. 또, 코로나야 고맙다.

4. 막내 처남 포차 OPEN

고등학교 시절에 아내 집으로 전화를 하면 아내 대신 전화를 받곤 하던 어린아이가 하나 있있습니다. 저랑 띠 동갑이니, 제가 스무 살 때였으면 여덟 살이었을 겁니다. 아내와 사귀다가 결혼할 때가 스물여덟 살이었으니 그때 막내 처남은 열여섯 살로 중3이나 고1이었을 겁니다. 그런 막내 처남이 군대를 다녀오고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부지런히 했는데, 영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사귀던 여자들과도 여러 번 실패하면서 얼마 전까지 혼자 주류 배달업을 하였는데, 최근에 좋은 사람을 만나서 포차를 함께 열었습니다.

4월 11일 김상진열사추모식에 가기로 결정하였을 때에 겸사로 막내 처남이 오픈한 가게에 가기 위하여 아내와 함께 군산으로 가면서 형님과 형수님께 알리고, 서울에 사는 두 아들에게도 연락을 하였습니다.

사돈 처남이 포장마차를 개업하였다고 함께 해주신 형님과 형수님, 멀리서 막내 외삼촌 개업했다고 함께한 두 아들에게 고마워 제가 계산을 할까 하였는데, 서로 마음을 보태자고 하여서 뿜빠이를 하였습니다. 그래야 더 자주 모일 수 있다고 생각하여 2, 3만 원씩을 지원받아서 계산을 하고 다음을 기약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제법 멋진 저녁 술자리를 함께하여 행복하였습니다. 혹시나 군산에 가실 일이 있으면 군산시 수송동 신지길 69에 위치한 “청하”라는 실내포차를 한번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 결단 카메라를 버리다.

한때는 사진에 미쳐서 삼성 NX10, 니콘 D100, 캐논 EOS700 등을 사용하면서 엄청난 작품을 찍어보겠다고 셔터를 눌러댄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추억을 남겨주리라 결심하고 캠코더를 부지런히 들이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내놓고 보니 가장 좋은 추억은 그냥 그런 행위와 함께한 시간이었지 그 결과물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10여 년 전부터는 사진이 그리 중요하지도 않게 되었으며, 핸드폰 카메라면 충분해서 무거운 카메라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짐을 정리하다가 방치된 카메라를 버립니다. 누구는 추억이 묻어 있는 골동품이라며 가지런히 잘 모아두는 분들도 계신데, 저는 그렇지를 못해서 그냥 버리는 것으로 정리를 합니다.

제가 깜냥에 잘 버리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가끔 정리를 하다가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버리는 노력을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엔 또 무엇을 버릴지 고민입니다.

제법 비싸게 구입하여 사용하던 카메라들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처음에 생각하고, 메모하고, 시작한 것과는 내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사는 것도 이렇게 순간순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 생각하는 대로 되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10년 전에 생각한 것과 하나도 같지 않고, 지금 생각하는 것이 10년 후에는 지금 생각하는 것과 전혀 같지 않을 것을 알기에 오히려 내일이 기대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우선은 다음에는 제가 어떤 글을 쓸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다만 즐겁고, 좋은 일이 힘들고 나쁜 일보다 많았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실시간 중계를 조금 더 하자면, 지금은 4월 12일 오전 7시 0분입니다. 이제 저는 아는 분께 분양받은 텃밭에 옥수수, 토마토, 가지 등을 심으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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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양_ 두 차례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지난해 와포햇살영농조합법인에서 연구부장으로 근무하였고 중학교 텃밭교육 및 귀농인과 청년농업인 컨설팅을 했다. 종자기술사, 농화학기술사, 시설원예기술사 자격증과 천문지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사단법인 농업조사전문가협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ljycby@daum.net)

Last modified: 202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