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세포 실종 사건의 전말
노광준 전 경기방송 피디, ‘방송이 사라지던 날’ 저자, 농화학 88
주요 등장인물
강한우 : 노벨의학상이 유력했지만 의문의 줄기세포 사건 직후 잠적한 과학자 (이후 그를 리비아 내전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고, 시베리아 얼음동굴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한 소식을 아는 이 없음.)
합수본 : 줄기세포 실종사건 합동수사본부의 약칭, 검찰-언론-한국대의 섣부른 결론에 맞서 누리꾼들이 SNS를 통해 자발적으로 결성한 액션 그룹으로 중학생부터 현직 의사까지 다양한 인적 구성
나 : 합수본의 일원인 심야 라디오 피디, (닉네임 노진구)
2022년 3월 서울
며칠 전 옥상 정원에서 아무 생각 없이 봄 볕을 쬐고 있을 때였다. 지난겨울이 너무 추웠는지, 내 몸이 부실한 건지, 봄 볕은 너무나 포근했고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우두커니 앉아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내 손안에 있는 폰이 이메일 한 통이 왔음을 알렸다. 모르는 사람의 메일이었다. 그러나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메일은 ‘노 피디님께 문의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열어봤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내용이었다.
“강한우 박사님의 근황을 뉴스나 인터넷에서 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어서
혹시나 피디님은 박사님의 근황을 알고 계시지 않을까 싶어서 메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노 피디님, 다른 건 묻지 않겠습니다, 강한우 박사님이 어디에 계시든 간에 건강하게 진행하시는 연구 계속해서 잘하고 계시는지만 알려주시면 저에게 큰 빛이 되고 힘이 될 것입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먹먹했다. 그저 그가 건강하게 연구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큰 빛이 되고 힘이 된다니…. 이것이 과학자만이 지닌 특권일까, 메일을 보낸 분의 간절함 앞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즉시 답장을 보냈다. 아주 심플하게, 이러저러한 부연 설명 없이 딱 핵심만.
“저도 제한적이긴 하지만, 강한우 박사님은 누구보다 건강하게 많이 웃으시면서 안정적으로 연구에만 몰두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줄여 써도 너무 줄여 썼다. 이렇게 쓰는 건 그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른바 강한우 관련주…. 정작 본인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연구만 할 뿐인데 마치 무슨 관련이 있는 것처럼 테마주로 엮어가던 이들이 제법 있었다. 결국 수많은 개미들이 피해를 봤다. 그걸 알기에, 이렇게 드라이하게 쓰는 게 답이다. 친절하게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붙이는 순간 그 뜻과 무관하게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대로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답장은 그로부터 약 한 시간이 지나서 왔다. 잘 받았다는 감사인사였다.
“이렇게 답변 주셔서 고맙습니다. 춘분 가뭄에 대지를 적시는 봄 비 같은 소식입니다. 이 메일 하나로 이제 다 괜찮습니다.^^ 더 궁금한 것도 없습니다.”
짠했다. 폰을 내려놓고 라이터를 찾았다. 후, 담배 연기가 퍼져나갔다. 습관처럼 혼잣말이 시작됐다.
‘정보의 비대칭…. 이거 완전 남북한 아님?’
70년이 지나도 남은 북을 모르고 북은 남을 전혀 모른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붙어있다. 웃기지 않은가? 이 사안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이 사건에 대해 세상은 두 개의 나라로 나뉜다. 한 나라는 강한우를 국제 사기꾼의 대명사로 믿어 의심치 않는 나라, 또 한 나라는 그를 과학자로 예우하며 연구기회를 주는 나라. 그런데 이렇게 상반된 두 개의 세상이 이 지구촌 위에 공존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의 소식도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이 정보화 시대에 말이다….
그가 결국 이 나라를 떠나 그곳으로 가기로 결심한 직후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한국대 교수 시절에도 연구비 때문에 이곳저곳 머리 조아려야 했는데, 지금은 연구비 걱정 없이 연구만 할 수 있어서 너무 마음이 편합니다. 원없이 연구만 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 그 소원이 풀리나 보네요^^”
그의 나이 70을 바라보던 해의 일이었다. 사실 나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에 대한 사기꾼 논란은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70세가 넘어서까지 연구 현장에서 땀 흘리는 사기꾼 본 적 있는가?
그러나 그를 사기꾼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나라의 국민들에게는 그저 음모론일 뿐이다. 그 어떤 객관적 자료를 제시해도 요지부동이다. 최초의 줄기세포인 NT-1의 미국 특허 등록 사실을 말하면 ‘그깟 종지 쪽지 하나 들고 뭔 호들갑이냐’고 반문한다. 사건의 핵심인 사기 혐의가 무죄로 확정됐다고 하면, 그런데 왜 언론 보도가 안 나오냐고 묻는다. 어쨌든 유죄 아니냐고 되묻는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이슈가 불거져 나오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두들겨 팬다. 그게 아니라는 팩트체크가 나올 즈음 언론은 이미 다른 사안에 몰려가 있다. 마치 야구방망이를 들고 트럭 뒤에 올라탄 채 이 집 저 집 몰려다니는 조폭과 비슷하다. 그렇게 16년이 흘렀다.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한 변호사님의 워딩이 떠오른다. 지금 곱씹어봐도 참 명언이다.
“이 나라에선 생명과학 따위 필요 없다는 거지, 핸드폰만 팔면 된다는 거지.”
그렇게 혼자만의 궁시렁을 끝내고 이제 다시 일하러 내려갈 때쯤, 전화기가 드륵드륵 울린다. 태 기자의 전화였다. 그때 그 사건을 최일선에서 취재했던 방송 3사 기자, 나의 동네 후배…. 지금껏 주기적으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강한우 박사의 근황을 캐는 진짜 끈질긴 녀석이 하필이면 오늘 또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오늘 날 잡았구먼, 나는 결국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응, 태 기자.”
“형님,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서 전화드렸어요.”
“궁금하다는 게 내가 궁금한 거, 그 양반이 궁금한 거?”
“에이, 알면서 그러세요…. 지금쯤 뭔가 소식이 나올 때가 됐는데 영 없네~”
느물 느물, 스멀 스멀, 20년 차 기자의 화법에 말려 들어가면 안된다. 아무리 조그마한 단서라도 있는 대로 말하는 순간, 속옷부터 팬티까지 홀라당 다 벗겨가버리는게 그들이 가진 능력이다. 말리지 말자.
“무소식이 희소식 아닐까? 그 양반 소식 끊긴 지 너무 오래됐는데 태 기자가 좀 들은 거 있으면 알려주소.”
“에이….”
“아 진짜라니까.”
나의 완강한 방어막에 태 기자는 결국 전략을 바꾼다. 정색하고, 부탁 한 가지만 하겠다며 이런 말을 했다.
“형님, 나중에라도 혹시 강한우 박사님과 이야기 나누실 기회 있거든 이거 하나만 전해주세요. 방송 3사 기자들이 다 그때 <피디 추적> 걔들하고 같은 입장은 아니라고.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사람 의외로 많다고. 강박사님이 한국 국적을 완전히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꼭 한번 취재 기회 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세요.”
그 진지함에 나도 모르게 ‘그래’라고 답할 뻔했다. 휴, 다행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실없이 가족들 근황부터 시시콜콜한 방송국 사정까지 물어물어 빙빙 돌린 뒤 마무리했다.
미안하지만 이렇게 끊는 게 답이다. ‘더 이상 한국 언론에 기대할 것은 없다’는, 꽤 구체적인 경험치로 축적한 확신이다. 그렇다면 외국 언론은? 조금은 다른 것 같다. 나는 덮어놓고 큰 나라를 숭상하는 사대주의자가 아니지만, 이 사안에 대해 해외 언론은 다르게 접근하는 게 보였다. 그들 역시 가물에 콩 나듯 보도하지만, 시선 자체에는 편견이 없다. 과학적 팩트에 충실할 뿐, 뉴욕타임스도 그랬고 리베라시옹도 알 자지라도 그랬다. 조국에서 버림받고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몰락한 과학자를 그들은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결정적 고비마다 따라붙었다. 그들은 그랬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저녁 7시 지하철 2호선,
평소보다 30분 늦게 퇴근한다. 본격적인 콩나물시루, 그래도 예전보다는 덜하다. 그때보다는 말이다…. 아련히 그때 생각이 떠오른다. 그 겨울, 지금과는 달리 지하철 천장 위에 TV 화면에 매달려있어서 사람들이 고개만 들면 뉴스를 볼 수 있었던 2005년도, 객실 안에 빼곡히 서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일 순간에 ‘어’하는 표정으로 뉴스를 주시하던 그 순간 말이다.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드려야 할까요?”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그 시절 줄기세포의 줄자도 모르던 심야 라디오 피디였을뿐인 내가, 어찌하여 그 짱짱한 메이저 방송에서 취재 제1선을 담당했던 태 기자 같은 베테랑한테 오히려 거꾸로 질문을 받고 있을 줄이야.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정말 모르는 거다….
16년 전, 아니 정확히 17년 전이 되겠지. 2005년 12월 16일, 그때 나는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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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준_ 농화학과 토양학 실험실에서 흙을 파던중 BBC같은 농업전문방송을 꿈꾸며 방송에 입문, KBS TV 구성작가와 경기방송 PD를 거쳐 유튜브 기획제작자로 일하고 있다. 경기방송 PD로 재직당시 ‘현장의정포커스 – 쌍용자동차 사태 이후 대책편’으로 제38회 한국방송대상 지역시사보도제작(라디오) 부문 작품상 수상했다. (pdnkj@naver.com)
Last modified: 202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