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또 실패… 하지만 반드시 된다!
노광준 (경기방송 편성제작팀장, 농화학 88)
***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과학은 실재하며, 특히 8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확증된 사실관계들에 충실하였습니다.
지난 이야기 : 말에서 떨어져 식물인간이 된 슈퍼맨은 50세 생일을 앞둔 인터뷰에서 ‘복제줄기세포 연구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궁금했다. 복제줄기세포?
#5. 마의 8세포기
“복제줄기세포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한국, 서울대 병원 세미나실에서는 10여 명의 서울대 교수들이 신경외과 전문의 백선아 교수의 발표를 듣고 있었다. 미래의학연구회 정기 세미나.
“예를 들어 슈퍼맨의 몸에서 아무 세포나 떼어냅니다. 이를 세포핵을 제거한 여성의 난자에 이식해 복제배아를 만들죠. 여기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고. 이를 신경세포로 배양시켜 다시 슈퍼맨의 몸에 넣어주면……, 끊어진 신경세포를 줄기세포가 다시 복구해내면서 슈퍼맨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저게 ‘재생치료’라는 개념인가요?”
“그렇습니다. 세포로 세포를 치료하는 거죠. 그러다보니 미국에서는 ‘그동안 약물치료나 수술이 하던 걸 줄기세포가 대신할거다’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의학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거죠.”
“허허, SF 영화 같군요.”
교수들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자료를 본다. 그 중 한 교수는,
“아직은 시기상조 아닐까요?”
그러자 백선아 교수는 다음 화면을 넘기며,
“저도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 영상을 한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녀가 포인터를 누르자 영상이 재생된다. 생쥐의 동영상이었다.
“척수신경이 끊어져 하반신이 마비된 생쥐입니다. 보시다시피 앞발로만 힘겹게 기어가고 있죠. 그런데 호주 모나슈 대학 연구팀이 이 마우스(실험용 생쥐)에게 배아줄기세포를 주입합니다. 일주일 후 상태를 보시면…….”
순간, 교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마비됐던 생쥐의 뒷다리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백선아 교수는 계속해서 다음단계 영상을 보여줬다.
“3주 뒤의 영상입니다. 상태가 더 호전되었습니다. 뒷발을 질질 끌던 생쥐가 이제 뒤뚱거리지만 네 발을 모두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거 참…….”
“마술 같은 일이네.”
세미나실이 술렁였다. 백 교수는 다음 화면을 넘긴다. 사이언스 논문이었다.
“2년 전에 나온 <사이언스>지의 예측입니다. 줄기세포에 기반을 둔 재생치료가 실용화될 경우 치료대상 환자수를 예측하고 있는데요, 미국에서만 약 1억3천만 명, 세계적으로 25억6천만 명으로 예상했습니다.”
도표에는 구체적인 수치가 나와 있었다.
‘심장혈관질환 11억6천만 명,
자가면역질환 6억 명,
당뇨병 3억2천만 명,
골다공증 2억 명,
알츠하이머 8천만 명…….’
다시 한 번 술렁이던 교수들 중 한 명이 질문을 했다.
“그러면 저 배아줄기세포를 인간에게, 예를 들어 슈퍼맨한테 적용시킴에 있어 핵심적으로 풀 과제는 뭡니까?”
그러자 백 교수는 조용히 앉아있던 강한우 교수를 보며 말했다.
“저희보다는 강 교수님 쪽에서 풀어주셔야 할 부분인데요. 바로 세포복제가 관건입니다.”
“복제요?”
“그렇습니다.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배아줄기세포를 곧바로 사람에게 주입하면 ‘면역거부반응’이 옵니다. 배아줄기세포가 그 사람의 세포가 아닌 다른 사람의 DNA이기 때문이죠. 이를 극복하려면 자기 자신의 세포를 복제해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 실패하고 있습니다.”
강한우 교수가 입을 열었다,
“저희보다 앞서있는 미국, 영국, 일본의 복제팀들이 천문학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도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성공사례가 없습니다. 세포 배양이 2세포기에서 4세포기로, 4세포기에서 8세포기로 계속돼야하는데 이상하게도 4세포기 단계에서 멈춰섭니다, 8세포기의 벽을 넘지 못한다고 해서 ‘마의 8세포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마의 8세포기라……. 신이 인간세포의 복제를 허락하지 않는 건가요?”
의학교수 한 사람의 질문에 발표자로 서있던 백선아 교수가 입을 열었다.
“신이 허락하지 않는 건지 인간이 허락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연구에 대한 생명윤리적인 논란도 거셉니다. 과학자들은 인간을 복제하는 게 아니라 세포를 복제할 뿐이라고 하나 종교계, 특히 로마교황청에서는 절대 허용할 수 없다고 나오고 있고,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줄기세포에 대한 규제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백 교수는 또 다른 영상을 클릭했다. 부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연설이었다.
“치료용 복제는 여분의 장기를 위해 인간을 키우는 겁니다. 나는 인간복제를 금지하는 포괄적인 법안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이 법안은 미국에서 연구용 배아복제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복제를 금지할 것 입니다.” (조지 W. 부시, 2002.4)
“올해 4월 백악관 기자회견입니다. 이 기자회견 직후 미국의 수많은 노벨상 수상 과학자들이 편지를 보내 치료복제는 인간을 복제하거나 복제인간의 장기를 빼는 게 아니며 난치병 치유를 위한 과학이라고 반박하고 있지만……, 요지부동입니다.”
백선아 교수의 부연설명이 끝나자 모두들 맥 빠진 표정으로,
“쉬운 게 없네요.”
“아니, 세포를 복제하는 거지 인간을 복제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렇게 소설을 쓰니…….”
“그러게요. 저분들이 한번 저희 신경병동에 와서 보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많은데.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연구도 생명윤리 아닌가요?”
“솔직히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세포의 생명까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켜서 그 많은 사람들 죽어나가게 합니까?”
그 때 강한우 교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영국에서 시험관 아기가 태어났을 때 뉴스에선 곧 자판기에서 아기를 뽑아내는 세상이 올 거라고 했죠. 그러나 아기 자판기 대신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꿈에 그리던 아기를 갖고 있습니다. 또 복제양 돌리가 태어났을 때도 곧 히틀러가 복제돼서 돌아다닐 거라고 했는데, 그런 일은 없고, 저희 연구팀이 복제한 동물이 당뇨를 연구하는 질환모델로 쓰이고 있습니다.”
교수들은 강한우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침을 꼴깍 삼키며 주목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 가능하다고 하는 일은 굳이 우리 과학자들이 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과학자라면, 모두가 안 된다고 하는 일,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비록 능력은 미약하지만, 저희 팀도 마의 8세포기 장벽에 도전해 볼까합니다.”
#6. 노무현
두 달 뒤 PSB 방송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유력후보 네 사람을 초청한 ‘대선후보 TV토론’이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국민21의 정몽준,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원탁에 둘러앉은 가운데 진행자가 공통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생명윤리에 관한 질문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배아복제에 대해 논란이 큽니다. 종교계는 인간의 배아를 그 자체로 엄연한 인간 생명체라며 배아복제를 반대하고 있고, 그러나 일부에서는 난치병 치료를 위해서는 배아 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펴고 있고요. 정부에서도 생명윤리법 제정을 앞두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배아 복제를 허용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배아복제, 이에 대한 후보님들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대부분의 후보들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회창(한나라당) “단호히 반대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복제연구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정몽준(국민21) “기업인 출신으로 난치병 연구가 국가경제에도 커다란 도움을 줄 거라고는 보지만, 워낙 사회적 논란사항인 만큼 국가적인 관리체계가 만들어지기 전까진 한시적으로 금지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권영길(민주노동당) “당연히 반대하고요. 진보의 가치를 내건 현 정부가 배아복제를 허용하는 걸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현 정부 여당의 후보로 나온 노무현 후보가 이 자리에서 분명한 입장을 밝히시길 바랍니다.”
이제 사람들의 눈과 귀는 노무현 후보에게로 쏠렸다. 만면에 웃음 띤 얼굴로 다른 후보들의 말을 듣고 있던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노무현(새천년민주당) “인간을 복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결코 허용돼선 안 됩니다. 다만 장기의 부분적인 배양이 문제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판단이 어렵습니다. 물론 배아 그 자체는 신이 주신 것인 만큼 인간이 감히 그것을 조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전 세계적인 합의가 우선해야 합니다. 한국만이 홀로 배아 연구를 거부할 때 국제경쟁력에서 뒤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자 권영길 후보가 말을 끊었다.
“입장을 유보하는 겁니까?”
“신중하자는 겁니다, 원칙은 시장경제 논리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종교계와 과학계, 난치병 환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 좀 더 심도 깊은 논의와 기초 연구가 진행된 후에 인간이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입각해 생명윤리법 제정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빙빙 돌리지 말고 입장을 이야기하세요, 찬성입니까 반대입니까?”
“대통령이 과학자들한테 이 연구를 해라 하지마라, 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못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윤리법 제정을 신중하게, 다양한 의견을 들어서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자 좀 더 노골적인 질문이 들어왔다. 노무현과 지지율 1,2위를 다투고 있던 이회창 후보는,
“자꾸 법, 법 하시는데, 이 자리는 법조인을 뽑는 게 아니라 대통령을 뽑는 자리입니다. 저 역시 법조인 출신이지만 우리나라 과학기술발전에 큰 족적을 남기신 저의 백부님 고 이태규 박사에게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배워왔습니다. 정부가 21세기 성장엔진인 과학기술이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과 목표를 확고히 설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림이 없습니다. 노무현 후보처럼 토론해보고 결정하겠다? 나라가 혼란스럽습니다. 어느 세월에…….”
그러자 노무현 후보가 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이 후보님께서 백부 이야기를 하셨으니 저도 가족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 아들이 화학과인데, 이 녀석이 거길 그만두고 법대 가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겁니다. 제가 말렸어요, 이공계 가라고. 그래 지금은 IT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빠 말 들은 거 후회 안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웃음) 모든 후보님들이 자기가 당선되면 과학기술을 적극 도와주고 육성하고 또 이회창 후보님처럼 이끌고 가겠다고 하시는데,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정부가 과학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과학자들이 나라를 끌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양하고 많은 연구를 어떻게 정부가 끌고 갑니까? 과기부 장관부터 부총리 급으로 올려서 과학자의 목소리가 힘을 갖고 하고 그래서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의 질 발전을 도와주는 사회로 가겠습니다.”
한 달 뒤, 2002년 12월 20일 새벽 1시경, TV 화면에 큼지막한 속보 자막이 떴다.
‘노무현 당선 확정’
그 시각 여의도 민주당사에는 회견장을 가득 메운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가운데 노무현 당선자가 악수를 나누며 들어온다.
“저를 위해 뛰지 않은 분들, 저를 반대하신 국민들에게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저를 지지한 분들만의 대통령이 아닌 모든 국민들의 대통령으로서 심부름꾼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 국민을 위해 힘을 모읍시다.”
“노무현, 노무현, 노무현…….”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박수와 함성, 그리고 노무현, 노무현……. 그의 이름이 끝없이 연호됐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 선출됐다.
#7. 실패, 또 실패
12월 31일 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앞 컨테이너 박스.
가건물 형태로 지어진 줄기세포 실험실 안에는 실험복 차림의 강한우 교수가 힘없이 앉아있다. 연구원 한 명이 문을 나서며,
“선생님,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오늘이 말일인데 너무 늦었구나. 조심해 들어가거라.”
“선생님,”
“?”
“화이팅,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 복 많이 받자.^^”
그렇게 텅 빈 실험실에 홀로 남은 강한우는 눈을 감고 명상을 한다. 그러다가 공책 한 권을 꺼내들고 뭔가를 적는다. 실험일지.
‘정말 힘들다. 해도 해도 되지 않을 땐 피가 마른다. 연구팀 모두 ‘선생님, 이거 원래 안 되는 겁니다’라고 말했을 때는 늘 긍정적이던 나도 흔들렸다. 하지만,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 세포배양접시가 떠오르고, 내가 꼭 일으켜 세우고 싶은 환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강한우는 잠시 창문 너머 밤하늘을 보다가, 자세를 고쳐 앉고 정성들여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된다, 반드시 된다. 된다면 되는 거다.’
그리고 그는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논문을 뒤적였다. 중요 표시해놓은 부분은 가위로 오려 책상 앞에 붙여둔다. 컨테이너 실험실의 불은 오래도록 밝혀져 있었고, 마침내 2003년의 새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 줄기세포 생명윤리에 대한 대선후보 TV토론회는 가상의 설정이다. 그러나 각 후보들의 입장과 주장, 과학기술에 대한 이회창, 노무현 후보의 입장은 모두 정확한 사실에 기반을 두어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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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준_ 별명 ‘노진구’. 도라에몽에게 늘 민폐만 끼쳐 만화사상 최악의 캐릭터로 손꼽힐 만큼 띨띨하고 존재감 없던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우연히 라디오 피디가 되어 드라마 ‘도깨비’의 지은탁 양과 동종업계에서 일하고 있음. FM 99.9MHz 경기방송 편성제작팀장. 언젠가 농촌에 살고픈 닉네임 ‘시골피디’. (pdnkj@naver.com)
Last modified: 2022-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