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사 모임, 땅끝마을 고흥서 달려오는 이유는…”
[인터뷰] 이정양 와포햇살영농조합법인 연구부장 (농학 86)
임은경 선구자 편집주간
매년 6월 6일 현충일은 김상진기념사업회 가족한마당 행사가 열리는 날이다. 반가운 선후배들이 모이는 자리이지만, 그중에서도 더욱 반가운 분들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와주시는 회원들이다. 이정양 와포햇살영농조합법인 연구부장도 그 중 하나다. “오늘 새벽, 먼동이 트자마자 고흥에서 출발해 이곳까지 달려왔다”는 자기소개로 행사 때마다 다른 회원들의 감탄과 주목을 받는 분.
‘민주주의 탐방’ 행사로 치러진 올해 가족한마당에서도 어김없이 이 회원을 만났다. 점심식사 때 옆자리에 앉게 된 인연으로 받아든 그의 명함에는 종자기술사, 농화학기술사, 시설원예기술사를 비롯해 온갖 기사 자격증과 천문지도사 자격증까지 적혀 있었다. 밝고 적극적인 성격을 지닌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두 번이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가 다시 보였다. 남이 바라보는 기준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기술사라는 자격증이 우리나라에서 박사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는 대단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또 한 번 놀랐다.
2017년 즈음의 신문에는 그가 전국에서 단 두 명만 합격한 종자기술사를 취득했으며, 그것도 바로 일 년 전 농화학기술사 취득에 이은 쾌거라는 내용으로 ‘화제의 인물’에 오른 기사도 있었다. 이 회원은 매년 김상진기념사업회의 행사에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나주의 전남농업기술원에 근무할 때 광주에 사시던 정희중 선배님과 교류하면서 김상진기념사업회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럽게도 그 이전에는 김상진 열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죠. 그렇게 사업회 모임에 나오다보니 전부터 알고 있던 김원일, 안효진 선배와 김성영, 김원봉, 송태경, 남홍식 후배 등을 만났고, 이제는 매년 행사에 되도록 꼭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 회원은 전남 장흥 출신이지만 여섯 살에 전북 군산으로 가서 그곳에서 자랐다. 대학 졸업 후인 1993년에 결혼해 수원에서 살면서 석사과정을 공부하다가 1994년 7월에 전남농업기술원에 취직해 나주로 내려갔다고 한다. 2002년부터는 유자시험장이 있는 전남 고흥, 완도, 보성 등지에서 근무하다가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2012년 3월에 명예퇴직을 했다.
박사에 준하는 기술사 자격증만 3개,
그러나 도전은 계속된다
“잠시 쉬다가 2014년에 다시 공무원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2015년부터 작년까지 고흥군 농업기술센터에서 근무했죠. 농민을 직접 만나면서 일하고 싶어서 농촌지도사가 되었는데, 현실은 농민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농업연구사 시험을 보아 직군을 바꾸어서 3년 더 근무했죠. 그러다 저랑은 공무원 생활이 맞지 않는 것 같고, 어깨도 많이 아파서 그만 두었습니다.”
이 회원은 현재 농업경영컨설팅평가원과 와포햇살영농조합법인 두 곳에 적을 두고 있다. 귀농인을 컨설팅하고, 농산물을 판매하고, 중학교에서 텃밭 교육을 하고, 청년농업인 모니터링 겸 컨설팅을 한다. 그는 지금 하는 일이 훨씬 보람 있고 즐겁다고 말했다. 지금이 더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듯 편안하다는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인 공무원을 두 번이나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화제에 올리곤 한다. 하지만 그는 다 합쳐 22년간의 공무원 생활에서 큰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농업연구사였지만 연구 여건은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수많은 서류와 보고서를 작성하는 행정 업무에 매달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저는 기본적으로 나가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농민들을 만나면서 일하는 것이 즐거운 것 같아요.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지금이 더 좋고 행복합니다.”
이 회원이 6월 가족한마당에 처음 온 것은 2000년경이다. 2002년에 고흥의 유자시험장으로 발령받은 이후엔 거의 매년 참석했다. 6월 초는 유자 농사가 바쁘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6월 6일이 되면 그는 머나먼 고흥에서 수원까지 먼 길을 달린다. 여기에는 그의 젊은 시절 가슴 한 구석에 꾹 박혀있던 남다른 사연이 있다.
“1986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5.18을 알게 되면서 그냥 공부만 할 수는 없었죠. 하지만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상 ‘잡혀가지 않을 정도로만’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어렵게 자식을 대학에 보내놨는데, 데모해서 잡혀가고 부모님 가슴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선배들은 ‘모두가 구국의 길에 나서야 한다’, ‘잡혀가더라도 싸워야 한다’고 했어요. 엔엘, 피디로 편을 가르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지요. 1학년 때는 관악캠퍼스에서 학교를 다니니까 선배들이 후배들 학습시킨다고 수원에서 올라오잖아요. 그럴 때 선배들이랑 많이 싸우기도 했죠.“
87년 대선의 강요된 선택,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그래도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던 1987년 1학기에는 그도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러다 스스로 학비를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2학기 등록을 하지 못하고 12월 3일에 군에 입대했다. 그해 12월 16일은 대통령 선거일이었는데, 군에서는 그보다 며칠 앞서 투표를 실시했다. 그는 김대중을 찍었는데, 그날 밤 11시쯤에 자다 말고 눈 내리는 운동장으로 불려나갔다.
“오백 명쯤 되는 신병들을 팬티만 입힌 채 그 추운 밤에 30여 분을 세워두었어요. 니들은 정신상태가 썩었다면서. 그리고는 내일 다시 투표를 하라며 들여보냈지요. 다음날 다시 투표를 했는데, 그때는 노태우를 찍었답니다. 부끄러움이 마음에 오래 남았어요. 제가 지금 김상진기념사업회의 행사에 다니는 것은 그 때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씻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등 4학년 때부터 집안일을 돕기 위해 농사일을 했던 그에게 농업에 관계된 내용들은 익숙하고 어렵지 않았다. 겸손인지는 모르지만, 공무원 시험을 쉽게 통과하고 수많은 농업관련 자격증들을 딸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라고 그는 말했다.
“자격증은 2013년에 두 번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가산점이 5점이나 부여된다는 정보를 알고 공부를 시작했지요. 정작 자격증을 하나도 따지 못하고 이듬해에 합격해 버렸지만요. 하지만 다시 취직하고 보니 제가 만나야 할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에 종자기사, 유기농업기사, 식물보호기사를 땄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박사과정을 포기해야 했던 그는 박사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는 기술사에 도전하여 2016년에 농화학기술사, 2017년에 종자기술사, 2018년에 시설원예기술사를 연달아 취득했다. 현재는 축산기술사에 도전하고 있으며, 예비 단계로 2019년 5월에 축산기사를 취득했다고 한다.
자격증 박물관이라고 해야 할까. 이 회원은 심지어 천문지도사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다. 2016년에 고흥군에서 천문지도사 3급 과정을 무료로 교육한다고 해서 별자리에 대한 호기심에 시작했다고. 그 과정에서 초‧중‧고 과학실에 먼지에 싸여 있는 천체망원경이 수두룩하지만, 그것을 가르칠 선생님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7년에는 자비를 들여 전국적으로 20명만 교육하는 천문지도사 2급 자격증을 신청하고, 전국의 다섯 곳(홍천, 대전, 영양, 보성, 산청)을 돌며 연수를 받고 취득하였습니다. 아직 딱히 천문지도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라도 학교와 도서관에서 학생들에게 별자리 얘기를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재미’를 찾아 열심히 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비결
공부와 농사와 여러 가지 생업으로 바쁘게 살던 그에게 올해 2월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다. 와포햇살영농조합의 신경남 대표가 그를 연구부장으로 영입한 것이다. ‘농업인은 생산에 전념하고, 판매는 다른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이 회원의 평소 뜻과 잘 맞아서 선뜻 받아들였다.
“와포햇살영농조합은 마을기업이면서 사회적기업입니다. 지역 사람이 자기 동네의 농산물을 가공‧판매하는 곳이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복지에 도움이 되면서, 남는 이익은 사회에 환원하는 곳이죠. 제가 하는 일이 농민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내 인생의 화두는 재미’라고 그는 말했다. 재미없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단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재미를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기술사를 준비할 때에는 농민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알리는 즐거움을 상상하면서 재미있게 했고, 천문지도사 연수를 받을 때도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밤하늘의 별을 찾는 아이들에게 별자리를 설명하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재미있게 했다.
“요즘에는 식품가공에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 식품기사와 식품기술사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제 아이들에게도 하고 싶은 것, 재미있는 것을 하라고 했더니 큰아들은 전기전자, 둘째아들은 역사, 막내딸은 책에 관심과 재미를 느끼고 제 길을 찾아 가더군요. 저는 재미있는 운동도 좋아합니다. 여럿이 같이 할 수 있는 족구도 좋고, 혼자나 둘이서 할 수 있는 당구나 볼링, 골프, 배드민턴도 좋죠.”
하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제일 잘하고 좋아하는 운동은 걷기이다. 걷기는 지병인 당뇨병에도 도움이 되는 아주 좋은 운동이라고 했다. 2011년에는 지리산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20시간 만에 56km를 왕복으로 종주했고, 지금도 매일 2만보 이상 걷기를 실천하고 있다. 혹시 지리산 당일종주나 당일왕복종주를 하고 싶은 분이 있으면 같이 하고 싶다는 바람도 밝혔다.
“6월 가족한마당에는 항상 가족과 함께 참석했는데, 올해는 아내가 직장 사정으로, 아이들은 각각 시험 준비 중이어서 함께하지 못했네요. 큰아들은 서울에서 전기기사 시험 공부 중이고, 대학생인 둘째아들과 막내딸은 기말고사 기간이었거든요. 하지만 지난 4월 이천에서 열린 김상진 열사 추모식에는 아이들과 함께 참석했답니다.”
그는 먼 훗날 아이들이 결혼하면 아이들의 아이까지 데리고 여행 삼아 가족한마당 행사에 계속 오고 싶다고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의 삶에 매우 만족합니다. 경제적으로도 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때 있던 삼천만 원의 빚을 다 갚았고, 시골에 작지만 제 집이 있으니 이만하면 안정된 삶이지요. 앞으로 한 가지 꿈이 있다면 아이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면 매달 50만원 정도의 장학금을 필요한 곳에 기부하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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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경 _ 대학 졸업 후 인터넷 신문 ‘민중의소리’ 기자로 일했다. 남보다 조금 더 잘하고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 글쓰기여서, 아무래도 이것이 평생의 업이 되지 싶다.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안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김상진기념사업회에서는 선구자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atree12fly@daum.net)
Last modified: 2022-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