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5:38 오후 117호(2019.07)

5월의 기록

5.18 당시 고3 시민군 경창수의 항쟁기

경창수 (안산의료생협 이사장, 농지도 81)

경창수 안산의료생협 이사장이 지난 2월 11일부터 자유한국당 의원 등의 5.18 망언을 규탄하며 국회 앞에서 무기한 천막 농성중이다. 5.18 당시 광주 동신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경 이사장은 광주민중항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최후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다가,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무력진압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가 광주에서 직접 겪은 10일간의 이 기록은 지난 2009년 안산 지역 언론인 ‘그래스루티’에 실린 바 있다. [편집자 주]

518일 저녁. 친구(지대위) 어머니께서 “대위가 집에 안 들어오니 찾아봐 달라”고 전화를 하셨다. 그래서 다음날 대위를 찾으러 광주 시내에 나가게 되었고,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장면을 보았다. 총검에 찔린 사람, 곤봉에 맞은 사람, 데모하다 쫒기는 사람, 잡혀서 트럭에 실려 가는 사람 등.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은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함 그 자체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총검과 곤봉을 휘둘렀다. 나이 드신 할아버지들의 말씀이, “6.25 인공시절에도 저러진 않았다”고 하셨다. 친구는 18일 시내 중심가 학원에서 나오던 중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아 머리를 총검에 찔린 채 트럭에 실려 서부경찰서를 지나 상무대 영창에 갇혀 있다가, 23일쯤 풀려났다.

친구가 트럭에 실려 가면서 공수부대원이 “우리는 산에서 뱀 잡아먹고 훈련을 하다 평양에 투입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광주가 평양인줄 알고 왔다는 것이다. 또한 얼굴과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술을 잔뜩 먹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520. 내가 광주 시내에서 목격한 공수부대원들도 상태는 비슷했다. 공수부대의 인간 이하의 진압장면을 보고 피가 솟구치지 않을 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때부터 나는 시위대에 합류했고, 20일 저녁부터 시위는 대규모화하였다.

​우리 집은 학운동에 있었다. 학운동 삼거리에서 어떤 젊은 여자(전옥주. 뒤에 상무대 영창에서 이름을 알게 됨. 간첩으로 몰려 고문으로 엄청 고생했다고 들음. 지금은 시흥시에 살고 있음. 20일 저녁부터 21일까지 눈 한 번 안 붙이고 확성기를 통해 시위대를 이끌었음)가 전파사에서 산 확성기를 픽업 차에 싣고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을 죽이고 있다”면서 계엄군을 몰아내자고 호소하는 방송을 하였다.

520일 저녁 7. 학동 방면에 약 5만 명 정도의 시민이 모여 도청을 향해 진격하였다. 공수부대는 도청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민이 죽거나 다치거나 끌려갔다. 학동 방면 쪽 도청 입구 길에는 폐타이어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불을 지폈다. 도청 주위는 저녁 내내 일진일퇴의 격전장으로 변했다. 버스 한 대가 불이 붙은 폐타이어를 지나 도청을 향하여 돌진하였고 그 뒤 소식은 모르겠다. 그 버스에는 서너 명 정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520일 저녁 10. 너무 지쳐 집으로 돌아가려고 금동 서점가를 지나던 중 러닝 차림의 청년을 만났다. 그 사람이 “학동 파출소 부근에 계엄군에 의해 사람이 찔려 죽은 시체가 있다”면서 외곽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일이면 시민들도 무장하여(광주시민들을 위해 화순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 등을 지원해 줄 거라고 귀띔해줌) 계엄군을 물리칠 수 있다”면서 집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옛날에 다녔던 교회(제일교회)가 근처에 있어 교회 문 앞에서 “목사님, 목사님” 하고 애타게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밤은 깊어가고 무섭기도 하였다. 목사님 집은 교회 뒤쪽에 있었고, 교회를 관리하는 소사 집은 앞쪽에 있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그 뒤 나는 절대로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확성기 소리가 나는 전남대병원 쪽 로터리로 가서 시위대에 다시 합류하였다. 노동청과 세무서를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의 격전이 벌어졌다. 시위대가 진격하다 계엄군이 장갑차를 몰고 오면 전부 후퇴하여 다른 쪽으로 가서 진격하는 등 말 그대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청이 불타고 세무서가 불탔다. 세무서에 불을 지르러 들어간 몇 사람은 계엄군의 진격으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엄군에게 당했다. 나는 간신히 세무서 맞은편 길옆 주택에 피신해 있었는데, 세무서에서는 아비규환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주택 주인은 정말 좋은 분이었다. 5~6명 정도가 그 집 입구에 있는 화장실 위 슬래브에 쭈그리고 숨어 있게 도와주셨다. 10여 분 정도 지나 주위가 조용해 졌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충장로 입구 쪽에서 확성기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도청 뒷담 길을 따라 충장로 쪽으로 무조건 뛰기 시작했다. 정말 무서웠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시위대에 다시 합류하였다. 주로 훌라훌라송에 맞춰 “계엄군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노동청 세무서에서 일진일퇴하던 시위대의 규모는 5만 명 정도 되었다. 광주공원 등 광주시내 전역에서 싸우고 있다는 소식도 확성기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521일 새벽 1. 장갑차와 일진일퇴하던 버스기사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 2시경에 노동청 앞길을 모두 확보하고, MBC 문화방송을 불태우고 전남여고를 지나 무등경기장을 향해 행진하였다. 노래는 훌라훌라송과 아리랑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등 다른 몇 곡을 행진하면서 불렀다. 계엄군을 뚫고 행진하니까 승리했다는 기분 때문인지, 날이 새는지도 모르고 행진을 하였다. 무등경기장에서 잠시 쉬고 광주신역으로 향했다.

521일 오전 7. 신역에 도착하니 공수부대 옷을 입은 군인 두 명이 도망쳤다.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하기라도 하듯이 철도에 있던 화물열차를 훌쩍훌쩍 넘어 도망쳤다. 뒤 좇아 갔지만 너무 빨라 놓쳐버렸다. 공수부대가 도망친 신역에서 처참하게 살해된 시신 2구가 발견되었다. 다른 시신도 있었는데, 다 치우고 두 명의 시신을 미처 처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리어카에 시신을 싣고 전남 도청으로 향하던 중 시신 2구가 더 발견되었다.

521일 오전 9. 시위대는 날을 새고도 사기충천하였고, 금남로 4가 사거리에 도착하여 군과 대치하였다. 이날은 초파일이었다. 길에서 떡을 많이 얻어먹었다. 시민들이 내놓은 주먹밥과 박카스 등도 먹었다. 대치하면서 몇 번의 협상이 있었다. 그러나 협상은 답보 상태였다. 시민들은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다. 무기는 각목과 화염병이었다(화염병은 이때 처음 봄).

521일 오전 12. 전일 빌딩과 광주YWCA 건물 근처까지 전진했다. 금남로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은 처음이었다. 시위대가 도청에 근접했다. 이날 오후부터 시민들도 무장하기 시작했다. 총과 장갑차 등이 등장했다. 시위대가 점점 시민군이 되어간 것이다. 시민군 중에 장갑차를 몰고 상반신에 태극기를 휘감고 도청으로 가던 중 총에 맞아 죽는 사람도 있었다.

521일 오후 1. 시위대 선두에 있던 나는 거의 도청 앞 분수대에 접근했다. 이때부터 총알이 날아왔다. 계엄군 장갑차에 있는 오공탄에 불이 붙었고, 주위 사람들이 쓰러졌으며 모두 후퇴하기 시작했다.

귀 옆으로 총알이 핑~ 하고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땀이 났다. 뛰기 시작했다. 전일빌딩을 눈앞에 두고 그만 옆에서 함께 뛰던 사람이 쓰러졌다. 옆구리에 총탄을 맞은 걸 보면 전일빌딩 옥상에서 저격수들이 쏜 총에 맞은 것이다(계엄군은 도청일대 빌딩 옥상에도 저격수를 배치해 놓고 있었음). 다른 사람과 함께 부축하여 전일빌딩 뒤로 옮겨 병원으로 후송시켰다. 그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521일 오후 4. 전일빌딩 뒤쪽에 있던 경찰들은 질서를 유지시키고 시민들을 도와 퇴로를 만들고 환자후송을 도왔다(경찰은 군이 시내를 장악하고 나서는 일개 시민에 불과했다). 이제 도시는 피바다가 되었다. 병원은 총상자들로 넘쳐 났다. 광주 시민들이 너도나도 헌혈에 나서서 피는 부족하지 않았다. 시민군도 무장의 수준을 높였다. 칼빈 소총뿐 아니라 화순탄광에서 가져 온 다이너마이트, 기아자동차에서 납품 대기 중이던 장갑차 등으로 본격적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서로 간에 무력충돌만 남았던 것이다. 계엄군은 도청만 지키고 있었다. 도청 주위의 시민들은 뒤로 퇴각하였다. 칼빈 소총으로 경무장한 시민군이 트럭이나 버스를 타고 도청을 향하여 진격과 퇴각을 지루하게 벌였다. 도청 앞 분수대 주위 광장에는 수많은 헬기가 내렸다 떴다를 반복했다. 도청에 있는 중요 문서나 중요 인물이 피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도청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엘엠지 기관총이 전대병원 옥상에 설치되었다는 말도 들렸다. 돌이나 각목, 화염병으로 진격하던 시대는 끝났다. 시민들은 도청 주위 도로에서 “연행자를 석방하라”, “계엄령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이어갔다.

날밤을 새서 그런지 너무 몸이 안 좋았다. 그래서 양림동 친구 매형 집에 들려 한숨 잤다. 그리고 집으로 갔다. 21일 초파일날 오후 5시 이후에는 시내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른다. 그 뒤에 들은 바로는 오후 6시 전후로 계엄군은 도청 뒷담을 넘어 지원동 방향으로 퇴각하였다고 한다. 시민들도 잘 모르고 있다 저녁 8시에 도청에 들어가 보고서야 텅 비어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마침내 광주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계엄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이다.

22일부터 26일까지. 수차례의 궐기대회와 가두행진이 있었다. 나는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 앉아 호소와 연설을 듣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 죽어 돌아온 아들을 살려내라고 외치는 어머님, 동생을 찾는 애타는 누나의 호소, 인간 이하의 공수부대의 잔악한 살육에 대한 규탄, 결사항전의 결의, 현재 정부와 협상경과 보고 등 수많은 연사들의 애절하고도 비장한 호소와 연설이 이어졌다.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는 5만 여 명의 시민들이 꾸준히 모였다. 비가 와도 시민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궐기대회가 진행되었다.

궐기대회가 끝나면 가두행진이 있었는데, 주로 플래카드 양옆에 있는 각목을 드는 일을 했다. 플래카드에는 “계엄령을 해제하라”고 적혀 있었다. 외신 기자들(기억으로 독일 MBC, 미국 NBC인 것 같다)에게는 사실대로 똑바로 보도하라고 영어(exactly report)로 반복하여 요구하였다.

39년이 지났는데도 이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외부에서 진실을 정확히 알고 도움을 주길 바라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광주는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광주와 인접한 화순, 담양, 효천, 송정과 경계선에 대치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시내 어느 건물 기둥에는 미 미드웨이 항공모함이 광주를 지원하기 위하여 진주에 입항해 있다는 대자보도 보였다.

26일 전남도청. 내가 하는 일은 시민들을 안내하는 일이었다. 도청 본관과 식당 사이에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이 30여구 정도 있었다. 공수부대의 잔혹한 학살로 얼굴이 제대로 식별이 안 되는 시신, 목이 잘린 시신, 한쪽 팔이 없는 시신 등 총과 칼과 개머리판에 의한 시신의 훼손이 심해서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도청을 방문하신 분들을 시신이 있는 데까지 안내하여 확인하고 난 다음 다시 도청 정문까지 안내해드렸다.

신원이 확인된 시신은 입관하여 태극기로 덮어 도청 앞 상무관으로 옮겨졌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계엄군의 저지를 뚫고 도청까지 걸어오신 분도 계셨다. 내가 일하는 동안 3명 정도의 신원이 확인되어 상무관으로 옮겨졌다. 흐르는 눈물에 애국가를 부르며 상무관으로 옮겼다. 이름이 정확한지 모르겠는데 재학인가 하는 학생도 있었던 것 같다. 정문 옆 창고 같은 건물에는 총기와 군복 등 많은 물자가 있었다.

26일 전남도청 오후 5. “내일 계엄군이 도청을 진압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집에 가실 분은 가시고 끝까지 항전하실 분은 남으라”하여 나는 그날 저녁 도청에 남았다. 결사항전의 비장한 기운이 넘쳤다.

26일 전남도청 밤 10. 총기와 관련하여 훈련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교육을 하였다. 나도 칼빈 소총의 탄창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방법, 발사 시 탄피에 데지 않게 조심하라는 등 간략한 교육을 받았다. 철모와 군복과 군 비옷을 지급받았다. 식당 2층이었는데 40명 정도 교육을 받았다. 나는 도청 후문 쪽에 배치되어 자동차 엄호물 뒤에 몸을 붙이고 총구를 후문 쪽으로 방향을 하고 경계를 섰다. 같이 있던 분들이 서너 명 정도 되었다.

27일 전남도청 새벽 430. 건물 안쪽에서 우리를 향해 총탄이 날아왔다. 내가 “아군이다 쏘지마라”, 하고 외쳐도 막무가내였다. 아마 미리 잠입하여 있던 특수부대원들이 총을 쏘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뒷담 쪽에서도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였다. 나도 후문 쪽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새벽 어둠속이라 상황이 파악이 안 되었다. 총알이 오고가는 횟수와 소리 크기가 점점 커졌다.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이 정문 쪽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자고 하여 그쪽으로 따라갔다. 화단 경계석을 아래로 포복해 정문 쪽으로 전진하여 갔다. 어디에서 그렇게 총알이 날아다니는지 귀가 멍했다.

​시신들이 있는 곳에서 무슨 폭탄 터지는 소리 같은 굉음이 울려 잠시 멈춰 있다가 순간적으로 ‘여기 죽은 척 하고 있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정문까지 가기로 했으니 다시 정문까지 포복하여 갔다. 정문에 가니 경비가 “모든 외곽선이 무너지고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했다.

도청 정문 수위실 앞에서 몇 마디 나누는데 갑자기 폭탄 같은 게 터지는 것이었다. 도청 앞 분수대 쪽에서 날아와 터졌다. 장갑차가 있는 정문 쪽에 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수위실 창구 밑에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몇 초지나 내가 살았나죽었나 내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허벅지가 아픈 것을 보니 살아 있었다. 손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다.

M16으로 긁어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도청 정문 쪽 아스팔트에 연발로 쏴대는 흔적들이 계속 새겨지고 있었다. 나는 도청 본관 가운데 계단 아래로 몸을 피신하였다. 총을 들고 있었지만 대처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피아가 구별이 안 갔다. 복도로는 계속 총알이 날아 다녔다. 귀청이 찢어질 만큼 건물이 울렸다. 나는 총알이 빗발치는 복도를 통하여 2층으로 갈수가 없어, 난간을 넘어 계단을 통해 올라가자마자 왼쪽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에는 4명 정도가 있었다. 총알이 벽과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다 같이 책상과 의자를 들어 벽 쪽에 붙였다. 밖에서는 계속 건물 쪽으로 총질을 해댔고 복도에도 총알이 날아다녔다. 복도 쪽에서는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준다”고 메가폰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야기하다 어떤 분이 “어린 학생은 살아남아 이 사실을 증언하라”면서 나보고 나가라 하였다.

그분이 철모를 벗기고 내가 오카와 비옷과 군복을 모두 벗고 총을 놔두고 문을 열고 포복을 하여 별관 쪽 계단 있는 곳까지 가서 공수부대에 잡혔다. 잡히자마자 “이 새끼 죽여 버려, 죽여 버려” 하면서 대여섯 명이 구타하고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었다. 총구를 머리에 갖다 대는 놈도 있었다. 총소리는 계속 울렸다. 건물 안이라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이 소리가 울렸다(거기에 플래시 터지는 듯한 밝은 섬광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외신기자나 이런 사람이 나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거기에 잡힌 사람 네 명이 있었는데 모두 원산폭격을 시켜놓고 군홧발로 등을 지근지근 밟아 깔아뭉개고 개머리판으로 허리를 내리쳐댔다. 개머리판으로 등 쪽 허리를 내리치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고 배창자가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 같아 배를 쓸어보았다. 창자가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정신없이 맞고 얼마 지나 옆을 보니 2층에 20명 정도가 있었다. 두 명당 한 개씩 수갑을 채웠는데 나는 혼자서 양손에 수갑 하나를 찼다.

27일 전남도청 530분경. 고개를 숙이고 1층으로 내려와 도청 건물을 나와 도청 앞 시멘트 바닥에 엎드렸다. 약 100명 정도가 일렬로 엎드려 있었다. 등 뒤 옷에는 어떻게 잡혔는지 등급을 매겨 매직으로 썼다.

27일 전남도청 6. 군인 하나가 다가와 수갑을 풀어주려다 열쇠가 부러지는 바람에 작업을 중단하고 갔다. 이 군인은 오른 손등에서 피가 너무 많이 나고 수갑이 조여 피가 잘 통하지 않으니까 상처가 부패할까봐 선의로 수갑을 풀어 주려 한 것 같다. 이 상처는 도청 정문 입구 수위실 아래서 폭탄이 터질 때 얼굴을 손으로 감쌌는데 이 때 손등에 파편이 박혀 생긴 것이다.

27일 전남도청 630. 수갑은 상무대 영창 앞 연병장 입구에서 풀었다. 보안사에서 나온 요원이 바늘 2개를 이용하여 딸깍딸깍 조금씩 여러 번에 걸쳐 코를 밀쳐 풀어주었다. 일렬로 고개를 숙이고 도청 정문을 나왔다. 이때 눈동자만 돌려 앞을 보니 도청분수대 주위가 장갑차로 뒤덮여 있고 몇 대의 헬기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도청 앞에 대기하고 있던 닭장차에 실려 어디론가 실려 갔다. 고개를 못 들게 하고 밖을 못 보게 하였다.

실려 간 곳은 상무대 영창 앞 연병장입구 광장이었다. 가자마자 헌병대 차림의 키 큰 군인이 팬티만 입혀놓고 군화발로 돌려차기 옆차기로 얼굴과 온몸을 정신없이 구타하였다. 평상시였으면 즉사했을 정도로 맞았지만, 새벽부터 긴장한 탓인지 견뎌냈다. 각자 신원과 기초사실을 확인하였다.

연병장 담벼락에 세워 놓고 모두 총살시킬 분위기였다. 5시쯤 연병장 안으로 들어가서야 총살은 안 시키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연병장에서 또 굴리고 나서 영창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5방으로 들어갔다. 40평 정도 되는 삼각형 공간(반원형을 6등분한 공간)에 130명 정도가 들어갔다.

6시쯤 저녁식사가 나왔는데, 식판 국물 넣는 곳 밑바닥에 깔릴 만큼 된장국물을 넣고 바닥에 꽁보리밥 한 자락이 깔려 나왔다. 하루 종일 굶어서 먹기는 먹었는데 안 먹는 사람도 있어 눈치(?)가 보였다. 영창에서는 가부좌를 하고 꼼짝도 못하게 하였다. 눈동자만 돌아가도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게 하여 곤봉으로 손등을 내리쳤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이 일어도 피해서는 안 된다. 피하면 밖으로 끌려 나가 야구 방망이로 죽도록 맞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나도 눈동자 한번 돌아갔다고 엄청 당했다. 잠은 칼잠(책꽂이 책 꽂듯 옆으로 누워)을 자야했다. 좁은 방에서 130명이 자려면 칼잠을 잘 수밖에 없다. 목욕은 며칠 만에 한번, 1분 동안만 시간을 주어 물만 붓고 닦고 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4일후부터인가는 치료도 해주기 시작했다. 나도 손등의 치료를 시작했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영창 내 살벌한 분위는 나아져갔다. 심야에 간수(헌병)가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아가면서 조금씩 태도가 변했던 것이다. 5월 17일 예검(예비검거)으로 5방에 먼저 들어와 있던 박영선이라는 분이 “총을 들었느냐, 어디서 잡혔느냐”면서 몇 가지 물어보고 “고등학생이니 10년 정도 징역 살 거라”고 했다. 이런 쪽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약 10년 정도는 받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간수들의 눈을 피해 말을 하였다.

수사는 합수부에서 했다. 합수부는 안기부, 보안사, 도경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전남)도경 문 형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29일 오후 3시쯤 수사를 받으러 나갔는데, “언제부터 여기에 참가”했느냐고 심문해서 “26일 오후 3시에 집을 나와 도청에 들어갔다”고 진술했다.

민간인이 들어왔다. 내 맞은편에 앉았다. 민간인은 일체 출입을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 고위직에 선이 있는 사람이 면회온 듯하다. 그리고 문 형사는 잠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쪽지에 ‘26일 오후 3시’와 집 전화번호를 적어 그분에게 넘겨주었다. 그분이 책상위에서 쪽지를 잡는 순간 문 형사가 들어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민간인은 슬그머니 쪽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보기에는 문 형사가 보고도 모른 체한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집에 그 민간인에게서 전화가 와서 쪽지 내용이 전달되었다고 한다. 다음날 도경에서 집에 찾아와 아들의 알리바이를 조사한다면서, “아들이 집을 언제 나갔냐”고 물어보기에 전화온 것을 잘 해석하여 “26일 오후 3시에 나갔다”고 대답했다 한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나는 피라미여서인지 별 고문이나 가혹행위를 받지 않았다.

박남선 상황실장(자주 부르는 사람 이름은 얼추 안다)등 주요 간부들은 잠 안 재우기, 구타, 물 먹이기, 통닭구이, 전기 고문 등으로 한번 나갔다 오면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다. 영창 안에서 많은 분들과 이야기하면서 중복되지 않게 계산을 해보니 사망자가 1,500명 정도로 추산되었다(영창 안에서 나눴던 이야기는 다음에 정리할 시간이 있으면 정리할 것입니다).

나는 37일 간 영창에 갇혀 있다가 고등학생이라는 이유로 훈방되었다. 나오기 전에 “나가서 영창에서 보고 들은 것은 함부로 말하지 마라”는 특별교육을 받고 각서를 썼다. 교육청에서 줬다는 신발을 신고 나왔다. 집에 가니 할머니가 “우리 싯째(내가 셋째 아들이라 이렇게 불렀다)가 살아 왔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좋아하셨다. 온 식구가 좋아라했다. 아버님은 5월 27일 위험한 상황임에도 도청과 각 병원을 돌아다니시며 나를 찾으셨다고 한다.

​바로 전대 병원으로 가서 허리 다친 데를 비롯해 여기저기 검사하고 치료를 받았다. 구타에 의해 치아 손상도 있었다. 양손에는 파편이 너무 많이 박혀 “그대로 살아라”는 의사의 권유로 지금까지 몸에 지닌 채 살고 있다.

다시 학교를 다니고 1981년 서울대학에 입학했다. 5월 27일 김태훈 열사(서울대 경제학과 4년)가 침묵시위 도중 도서관 5층에서 “전두환이 물러가라!” 세 번 외치고 투신하여 산화해 갔다. 투신한 장소에 가보려 했지만 학교에 상주하는 백골단들이 둘러싸고 접근을 못하게 했다. 나는 이에 항의하다 관악경찰서로 끌려갔다.

광주항쟁이후 계속 요구하였던 진상규명, 학살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기념사업, 배상이라는 5원칙은 모두 적당한 선에서 얼버무린 채 지나가고 있다. 일제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니까 친일 후손들과 친일 논리가 발호하듯이, 전두환이가 합천 고향에 일해공원을 만드는 해괴한 일이 벌여지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 등 핵심인물 11명은 명령에 따라 죽고 사는 규율에 맞게 발포 명령자를 밝히고 진실한 반성의 표시로 자결하라. 광주학살에 참여했던 공수부대원과 군인들은 감추어진 사실과 암매장 장소를 밝히는 양심선언을 하기를 촉구한다. 광주항쟁은 아직까지 진실 규명조차 제대로 안 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5.18 광주항쟁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위해 산화해가신 모든 분들에게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 뜻을 이어 받아 생활 속에서 묵묵히 실천해 갈 것이다.

국회 앞에서 장기 농성을 벌이고 있는 경창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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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창수_ 5.18을 온몸으로 겪은 젊은 시절의 경험이 이후 평생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대학 졸업 후 공단과 이주노동자가 많은 경기도 안산에서 사회운동을 했다. 안산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지난해 사회적기업 육성에 기여한 공로로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Last modified: 2022-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