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농사의 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해온 15년,
그리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 농업이 인정받는 사회 만들기”위한 10년을 향해…
이영수 사람사는농원 원장(농사교, 94)
임세진 선구자 편집주간
농촌사회교육학과를 나와 전국농민총연맹(이하 전농)에서 5년간 정책실에서 굵직한 해외투쟁을 주도해오다가 돌연 귀농을 선언, 고향에 내려가 15년째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는 이영수 회원을 만났다. 어릴 때부터 농촌지도자를 꿈꿔왔다는 이영수 회원이 농부로서 살아온 15년의 삶과 더불어 앞으로 나아갈 방향, 그리고 선구자 회원들에게 바라는 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가슴 깊이 새겨져 있던 어릴 때부터 꿈, 농촌 지도자
“보통은 서울대는 가고 싶은데 학점이 안되니까 농대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저는 물론 점수도 안됐지만(웃음) 점수가 됐어도 농대에 갔을 거예요. 왜냐하면 중학교 때부터 희망대학에 서울농대라고 썼었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농대에 가야 되겠다, 이왕이면 서울농대에. 그리고 우리 농촌사회교육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 과를 찾다 보니까 서울대하고 한 군데 정도 더 있더라구요. 그럼 서울대에 가야 되겠다 해서 열심히 놀다가 공부를 시작했죠.(웃음)”
농촌 지도자를 꿈꾸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묻는 물음에 말 그대로 ‘어릴 때 꿈’이었음을 이야기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고향인 경북 영천을 떠나 대구로 유학을 간 이영수 회원은 ‘촌에 살았던 기억이 굉장히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한다.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놀았던 추억이 너무 아름답고, 아버지, 어머니가 열심히 일하며 사시는 모습 또한 아름답게 추억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열심히 일하시면서도 넉넉지 못한 형편을 보며 훌륭한 농촌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농대에 가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싫은 기색을 감추지 않으셨고 그런 부모님께 농대가 싫으시면 교대나 한의대를 가서 귀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정도로 농대를 나와 귀촌하는 것은 오래된 그의 삶의 방향이었다.
“부모님을 보면서 생각이 들었던 게 농촌 지도자, 훌륭한 농촌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제가 생각이 좀 조숙했던 거 같아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20대까지 일기를 매일 썼거든요. 그 일기장에 훌륭한 농촌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써있어요. 그런 마음들이 어느 정도의 깊이였는지 모르겠지만 늘 가슴 깊이 있었어요.”
여름지기, 학생회, 쌀 투쟁
그런 마음으로 들어간 농대에서 당연히 농동아리를 먼저 찾았다. 학생회보다도 농촌 현실을 더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우루과이라운드로 한참 세상이 시끄럽던 시절을 농동아리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농업 쪽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농동아리를 먼저 찾았어요. 그중 하나가 관악캠퍼스에 있던 ‘여름지기’라는 동아리였는데 거기 가서 열심히 할려고 보니까 맨날 미국이 어떻고, 한국사회가 어떻고 하면서 데모만 하는 거예요. 그게 불만이었어요. 그래서 그만뒀죠. 근데 마음은 계속 갔어요. 그래서 준회원으로 같이 활동하고….(웃음) 그리고 농업문제에 관심이 있으니까 쌀 선봉대 활동을 하고 과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그 당시에 94년도에 쌀 재협상, 우루과이라운드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집회에 참석하게돼고 그러다가 학생회 활동하면서 한총련 이적규정으로 수배도 되고, 구속도 되고, 수배당한 사람들끼리 조계사에 모여서 수배해제 농성단도 꾸리고 이렇게 약간 평탄하지 않은 생활을 하다가 졸업을 하고 공익근무요원 복무를 했죠.”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된 말년 휴가, 전농에서 보낸 7일
“공익근무를 마치고 농업농촌에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중 교수님의 대학원 진학 권유가 있었어요. 그래서 공부를 좀 더 하려고 했죠. 공익근무요원 복무를 3개월 정도 남긴 2001년 11월 13일에 서울 여의도 둔치에서 13만 명의 농민들이 모여서 농민대회를 열었습니다. 그게 아마 해방이후 단일대오 최대 인원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때 농민들이 우루과이 재협상 때문에 가장 고조되어있을 때였어요. 그때 전농 정책국장을 하던 이호중 선배가 와서 행사 준비를 도와달라고 하셨죠. 그래서 남은 휴가 일주일을 쓰고 서울에 올라와서 자원봉사를 하게 됐죠. 전국농민대회에서 농민들이 모이는 과정을 보고 그 역동성에 상당히 감명을 받았죠. 그런 찰나에 호중이 형이 “이왕 배울 거 농업, 농촌의 현장을 좀 알고 공부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 전농에 와라.” 이렇게 됐죠. 그래서 공부를 하더라도 현장을 배워보고 대학원을 가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농에 들어가게 됐죠.”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 전농 활동
처음에는 1년 내지 2년 정도 활동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간 전농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한·칠레 FTA로 한참 싸움이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정책실에서 일을 하다 보니 외국에서 자꾸 전화가 왔다. 실무자들은 외국어로 걸려오는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받은 외국어로 걸려온 전화에 Hello라고 답하자 주위에서 ‘야, 니가 국제연대 사업을 해라’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시작된 국제연대 사업은 멕시코 칸쿤 WTO 각료회의 저지 투쟁, 한·칠레 FTA 투쟁, 홍콩 WTO 각료회의 저지 투쟁, 제네바 투쟁으로 이어졌다.
“정책실과 국제연대 사업을 하게 되면서 이경해 열사가 돌아가신 칸쿤 투쟁도 제가 준비를 하게 됐죠. 그다음 해 홍콩 투쟁도 준비를 하게됐고요. 홍콩은 대여섯번 씩 다녀가며 국제회의도 많이 하고 홍콩 투쟁을 거치면서 국제적으로 한국의 농민운동에 상당히 관심을 갖게 되고,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각성하면서 국제적인 농민운동이 필요하고 각국에서 정책적으로도 압박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죠. 2005년 10월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개최된 도하개발아젠다(DDA) 농업협상회의 저지를 위해 출국, 비아 캄페시나(1993년 결성된 전 세계의 대표적인 농민운동 조직) 회의에 참석해서 농민인권선언이라는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러면서 5년을 근무하게 됐고 그 과정에 인생의 방향을 농민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죠.”
전농에서 배우자도 만났다. 2005년, 전농 경제사업단에서 일하던 방현경 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면서 현장에 내려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2008년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전농에서는 다들 말렸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제안을 해왔다. 전농에도 국제 운동을 하면서 정책적 역량을 갖춘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며 그 역할을 이영수 회원에게 제안한 것이다. 당시 전농에서는 전체회의를 거쳐 홍콩 투쟁을 하고 남은 재정의 일부를 국제연대 사업 자금(전문역량가의 유학 자금)으로, 몇천만 원을 마련해 놓았다는 것이었다. 고민을 안 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전농 선배님들께 ‘너무나 영광스러운 제안이고 감사드리지만,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버지께 동네 우사(창피)였던 귀향
이영수 회원은 동네(경북 영천 임고면)를 세 번 떠들썩하게 했다. 첫 번째는 서울대학에 입학했을 때, 두 번째는 서울 가서 공부 잘 하는줄 알았더니 갑자기 온 동네에 수배전단이 붙고, 체포조가 1년 동안 동네에 상주했을 때, 세 번째는 공익근무를 마치고 서울에서 잘 살다가 갑자기 귀향을 하겠다고 했을 때이다. 당시만 해도 귀농, 귀촌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농사 지으러 간다’고 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반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며느리도 아들 때문에 마지못해 내려온다고 생각하신 아버지는 며느리의 손을 잡고 “니도 속고, 나도 속았다.”며 한숨을 쉬셨다고 한다.
“농사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반대하는 농민운동하러 왔고, 먹고살건 없고, 아버지 보기엔 동네 우사(창피)고 당장에 경제적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먹고살아야되고, 무엇보다 심정적으로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가장 절박했죠. 그래서 보통 내려오자마자 농민회에서 역할을 맡기는데 저는 ‘안된다, 당분간은 내가 내 자리를 잡아야 되겠다, 양해를 해달라’고 이야기하고 농사일에 전념했습니다. 겨울 내내 눈이 많이 와서 차가 못 움직이지 않는 이상은 전정(가지치기) 배우러 다니고 쉬는 날 없이 정말 열심히…. 처음에 전정을 하고 나니 손이 하도 떨려서 밥을 먹을 수가 없더라구요. 밥 숟가락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손이 떨리는데 아버지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 숟가락을 밥상에 대고 고개를 숙여 밥을 먹었죠. 그런 게 내 몸엔 안 맞았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이겨내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아버지께 인정받기 위해 전정(가지치기)부터 배웠다. 전정을 하며 나무의 생리도 알게 되고, 농사의 방향도 보여 재미가 생겼다. 다행히 전정에 소질이 있었다. 지금도 농민회에서 전정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3년쯤 된 어느 날 열심히 전정을 하고 있던 중 그늘에 앉아 지켜보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그래(그렇게) 복숭아 농사 지면 굶어 죽지는 않겠네”라는 한마디를 툭 던지셨다. 이영수 회원은 그 한마디를 잊지 못한다. 농사를 짓고 난 후 ‘최초의 칭찬이자 나를 인정해주신 거’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저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살았던 거 같아요. 어떻게 하면 나름대로 복숭아 농사꾼이 최고가 될까 싶어서 복숭아 농사의 일인자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농사도 과학이거든요. 하늘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기술인데, 동일한 조건 아래 일등은 평생 일등하고 꼴찌는 평생 꼴찌를 해요. 그래서 과학이라고 얘기하는 거죠.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사람들과 전국 복숭아사랑동호회도 만들고 사비로 일본에 복숭아 연수도 같이 가고, 그러면서 나름 복숭아로 전국에 유명하게 됐고, ‘햇사레’같이 큰 브랜드를 가진 곳에서도 견학을 오고 있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깨닫고 난 후 힐링의 시간들
“큰 어려움은 서리피해가 가장 크죠. 살구 같은 경우는 한해 500 컨테이너를 따야 되는데 3년을 내리 다섯 컨테이너밖에 못 따기도 했어요. 보름을 넘게 새벽 3~4시에 일어나서 기온 확인하고 기온이 안 좋으면 불을 지피고 그런 노력을 했는데도 안되니까. 처음에 서리피해를 봤을 때는 아버지 산소에 가서 많이 울었죠. 한해, 두해, 세해 해보니까 이제는 덤덤해져서 하늘이 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와닿게 된 거죠. 열심히 노력했다면 그다음에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정말 내 할도리 다 했으면 그다음에는 내 몫은 아니다. 그러니까 나를 원망할 필요도 없고 탓할 필요도 없다라는 위로가 되더라구요. 농사를 짓는 매력이 그런 거 같아요. 농사를 지으면 철학적으로 되는 게.(웃음) 지금은 내 밭에서 농사지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특히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 해 질 녘에 라디오 클래식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일을 하다 보면 힐링이 돼요. 하루의 고된 일들(사람과의 관계, 지역 활동의 고민들 등)을 다 잊고 밭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집사람한테 그런 얘기를 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좋아하면서 일하는 것도 힘든데 힐링되면서 일하고 돈을 벌 수 있는 게 뭐있겠냐’고….”
자신에게 농사일이 맞는다는 것은 참 다행인 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와 맞는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대의나 명분 때문에 일을 해도 자기와 안 맞는 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귀농하겠다는 후배를 말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가진 역량이 농사보다 전농에서 정책 일꾼이 되는데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귀농, 귀촌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꼭 농사를 할 필요는 없다, 촌에서 살아가면서 대리운전을 하든, 보험을 하든, 농촌에 같이 살아남는 게 중요하고 농촌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다행히 힘든 과정이었지만 크게 힘듦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보람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기에 농사를 계속하는 거구요.”
살아남기, 적지(適地)와 고수 찾기, 가면 쓰기
말 나온 김에 귀농, 귀촌하려는 분들에게 조언해주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해주고 싶은 얘기는 많죠. 귀농이라고 하면 어쨌든 경제성이 있어야죠. 먹고살아야 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거죠, 아무리 좋은 철학과 좋은 마음으로 농촌에 오더라도 살아남지 못하면 그야말로 이상이니까. 살아남는 법을 잘 연구해서 당장의 내 농사 규모나 수입과정, 현황 그런 걸 고려했을 때 농사만 정말 열심히 짓고 싶지만 그게 어렵다면 부업도 기꺼이 해야 됩니다. 운전기사를 할 수도 있어야 되고, 아니면 다른 잡일을 할 수도 있어야 되죠. 이런 걸 기꺼이 감내해가면서 ‘어쨌든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줬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드리고 싶고요.”
“품종 품목을 선택할 때는 그 지역에 맞는 적지(適地)라는 게 있거든요. 한동네라도 길 아래 살구를 심는지, 길 위에 살구를 심는지에 따라 천지차이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가져도 적지를 찾지 못하면 결실이 잘 안 되죠. 품종을 선택할 때도 그런 것을 잘 고려해서 선택을 해야 되고, 그 품종과 적지를 선택했으면 주위에 좀 잘 아는 사람에게 배우려고 하지말고, 그 품종의 전국 최고의 고수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멘토로 삼아야 됩니다. 10년, 20년 가도 못 갈 길을 1년 만에 따갈 수 있어요. 어떤 분야보다 멘토가 가장 중요한 게 농사예요.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걸 찾아가기도 귀찮고 주위에 맘 편한 사람한테 얘기를 듣고 싶어 하죠. 그러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으니까 될 거 같은데, 농사는 안 그런 거죠.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그 분야의 최고의 멘토를 찾아서 그 멘토의 지도를 받을 것. 그게 귀농한 사람들한테 가장 중요한 거 같아요. 멘토를 만났으면 그 멘토가 자기를 제자로 삼아주게 만들어야 돼요. 사실 어느 정도 기술을 가진 고수들은 질문을 두세 번 정도 하면 정말 내한테 배우러 왔는지, 그냥 지가 필요해서 아쉬워서 왔는지 바로 알아요. 저 또한 마찬가지구요. ‘무슨 품종 심어야되요, 아니면 적과는 어떻게 해야되요.’ 첫 번에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저렇게 설명을 해주면 다음에 질문이 ‘그런데 적과를 해보니까 이런 문제가 있어요.’ 이렇게 질문해야 되는데 또 똑같은 질문을 해요. ‘해보니 안되던데요. 우예해요?’ 마음가짐이 그런 정도이면 제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실제로 적과를 해보니까 어떤 건 앞에 달려있고, 어떤 건 뒤에 달려있고 굵기와 모양에 따라 다른데 어떻게 해야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은 ‘아, 이 친구가 배우려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죠. 무작정 찾아간다고 절대로 안 가르쳐 줍니다. 저같은 경우도 엄청나게 와요. 내일모레도 창원에서 온다고 하거든요.”
“귀농이던 귀촌이던 지역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알아야 된다, 어울림을 위해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약간의 가면도 쓸 줄 알아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공기 좋고 남들 간섭 안 받고 싶어서 내려왔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관심인 거예요. 저 사람이 왜 내려왔을까,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지나가면서 ‘어~ 잘 주무셨습니까?’ 이러고 좀 늦게 일어나면 ‘아이고, 해가 중천에 떴는데 늦게 일어났는 모양이지요?’ 이게 그 사람들의 언어예요. 그냥. 근데 ‘내가 그렇게 일어난 걸 와 얘기하노? 할마시가?’ 그럴게 아니고 ‘아 예예, 좀 늦게 일어났는데, 어디 가시는 모양이지요?’라는 말 한마디 건네는 가면을 쓸 줄 알고, 그런 성격이 아니더라도 처음 왔을 때 막걸리 열병만 사들고 마을회관 가서 인사하고 얘기를 나누면 결국은 막걸리 열병의 열 배, 백 배의 마음들이 돌아와요.”
이영수 회원이 나름대로 지역에서 자리를 잡은 후 귀농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귀농인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초청받아 방문한 귀농인의 모임에서 자신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우리(귀농인)끼리 모여야 하는데 와 저런 사람을 불렀냐’, ‘저 사람이 어때서 그러냐’며 다투는 모습을 보고 돌아온 다음날, 농민회에서 개최한 ‘복숭아 학당’에 욕하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와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지역의 혜택은 당연히 받으려고 하면서도 자기들끼리 폐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 때문이다.
“귀농했던 사람들이 지역에서 받는 서운함들이 이해가 돼요. 그래서 당장에 귀농한 사람들끼리 말을 하면 서로가 공감대가 형성되니까 좋아. 그래서 거기에서만, 그 사람들끼리만 놀라고 하고 폐쇄성을 갖기 시작해요. 그래서 복숭아를 정말 잘하는 사람한테 배워야 하는데 자기들끼리 잘하는 사람한테 배우는 거예요. 자기들끼리의 네트워크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근데 달리 생각하면 저는 그런 얘기를 하죠. 우리 동네도 집성촌이기는 하지만 진짜로 오리지널로 있던 사람들은 30%도 안된다, 나머지는 다 들어온 사람이다. 30년이 됐든, 50년이 됐든, 10년이 됐든, 그 사람들이 다 결국은 귀농의 선배들이다. 그 선배들은 어떻게든 남았고 일원이 된 사람들이다.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 이런 부탁을 드리는 거죠.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한 일 년만 가면을 써보고, ‘이 촌놈의 영감쟁이들….’ 이런 마음이 생겨도 일 년만 사업하듯이, 보험 팔러 왔듯이 기분 좋게 맞장구쳐주는 지혜를 가지면 정말 마음이 편할 거예요. 왜냐하면 공기 좋고 남들 신경 안 쓸려고 오는 농촌에 내 옆에 사는 사람들하고 불편한 채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일 년만…. 그리고 촌에 할매들이 쪼매만 갖다 주면 그 배 이상을 갖다 줍니다. 내 쪼매 남은 치킨, 호떡 하나 갖다 줘 보이소, ‘에헤~’ 하면서 ‘아침에 거 뭐 놔놨데이’, 이러면서 마음이 풀어지고 서로 관계를 맺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희생하고 엄청난 관계를 맺으라는게 아니고 그런 정도의 지혜를 가져주면 훨씬 넉넉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귀농, 귀촌이 농촌의 희망
그런 마음에 이장(里長)을 할 때 외부에서 온 사람들과 지역민들이 어울릴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자리를 만들었다. 귀촌, 귀농인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장을 한 5년 했는데, 어쨌든 귀농, 귀촌한 사람들이 농촌에서는 자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있는 사람들도 마인드가 바뀌어야 하거든요. 들어온 사람이 아니고 우리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우리동네에는 들어온 사람이 부녀회장, 노인회장, 지금 청년회장까지 해요. 맡겨놓고 기회를 주면 더 잘해요. 그래서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가, 그리고 옆에서 누가 좀 도와주느냐가 중요하죠. 귀농, 귀촌이 아니면은 농촌에 희망이 없거든요. 사실, 어렵죠. 농촌이 유지되기도 어렵고, 그럼 결국 그것이 지역 소멸, 지역 소멸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국토의 불균형을 가져오게 되죠. 그게 우리 사회의 굉장히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요. 지금 한 사람이라도 더 우리 동네로 땡겨오고싶어서 ‘땅 좀 헐케 알아봐주께.’ 이카고 있구요.(웃음) 실제로도 몇 사람 땡겨왔고요. 그러고 있습니다.”
귀농을 후회하지 않는 귀농인들, 그래서 필요한 정치
“처음 내려왔을 때만 해도 제가 막내였어요. 근데 지금은 또래나 저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 중 저와 연계를 맺는 친구들만 해도 3-40명이 넘어요. 저와 연계를 맺지 않는 친구들은 더 많겠죠. 지금까지는 나간 사람은 없고요. 촌에 온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귀농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귀농하면서 받았던 귀농지원자금의 원금상환이 부담스럽다는 거예요. 경제적인 문제만 아니면 귀농한 건 너무 좋게 생각한다는 친구들이 거의 대부분이예요. 실제로 귀농이 그 정도로 매력이 있는 거죠.”
“우리 애가 농사를 짓겠다고 하면 기꺼이 밀어주고 싶고, 농업 쪽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게 농업생명 쪽일수도 있고, 바이오 쪽일 수도 있겠죠. 저는 이 부분에 대한 역할들을 사회적으로 훨씬 높여놔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그 가치들을 제대로 평가해내야만 올바른, 건전한 사회, 지속 가능한 사회로 간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죠. 농업농촌에 대한 비전이 분명히 있다고 보고 그 가치를 국가가, 차기 정부가 농업에 대한 비전을 제대로 그리고 정책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농촌도 세렝게티의 정글인 거죠. 같이 살아남기보다 나라도 살아남아야겠다는 상황이니까요. 현재 농업정책의 핵심은 규모화 된 대농가들에 대한 선택적인 집중적 지원이예요. 그래서 농업예산의 18%만 농민들한테 오고요. 82%는 유통업자, 건설업자, 도로사업자, 시설업자, 자제업자 이런 쪽으로 다 가거든요. 실제로 돈을 벌어가는 사람은 농촌에서 일을 하고 도시에서 출퇴근하는 그런 업자들인 거죠.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고,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해주느냐가 중요하죠.”
앞으로 10년, 세상의 중심에서 외치고 싶은 이야기들
“누가 물어보더라구요. ‘앞으로 니 계획이 뭐냐?’ 생각해보니 계획이 없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래 살아왔더라구요. 그렇게 말씀드리니 ‘니뿐만 아니고 열심히 하는 친구들 다 그럴 거다, 나도 그랬었고. 니 나이 또래가 지금부터 10년이 가장 중요한 때이고 그거 지나면은 누가 불러주지도 않아. 그래서 니는 뭐할 거야?’ 이렇게 묻길래 ‘얼마 전에 조합장을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드리니까 ‘니 참 행복해 보이고 열심히 살아서 좋은데 니 행복에서 빠져나오기 싫어하는구나.’ 하는데 그 말씀이 마음에 큰 울림을 주더라구요. 앞으로 10년이 가장 에너지가 있을 시기는 분명한 거 같고, 어떻게 살까 고민을 하던 중 농대 선배와 통화를 하는데 ‘야, 너 할려면 10년밖에 없어, 그담에 아무도 안 찾아줘.’ 그런 얘기를 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었고요. 그러다 한달전쯤 집사람하고 생각지도 않게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10년을 세상의 중심에서, 그게 제도권이든 정치권이든 중심에서 내가 생각했던 농민운동의 영역을 좀 넓히고 싸워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에너지가 많을 때 어떤 식으로든 그 에너지로 좀 더 강하게 운동을, 세상을 바꾸는데 영역을 확장해보려고 마음을 먹은 거죠. 청년농학도로서 학생운동을 하고 농민운동을 하면서의 또 다른 연장선상의 과정으로 출발을 하는 겁니다.”
역전의 용사들이 또다른 혁명의 길에 참가해주시길….
“선배님들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 퇴임을 하고 뭘 할까 고민하시는 분들한테 특별히 하실 거나 인생의 계획이 없으신 분들은 다시 농업농촌으로 투신을 해주실 것을 요청드려봅니다. 사실 그런 인적자원들, 수많은 민주화 운동을 했던 엄청나게 많은 선배님들이 특별한 계획이 없으면 농촌에 들어가서 5년 내지 10년 동안 벙어리 3년, 장님 3년 이렇게 해서 가면 좀 쓰고 생활하시다가 이장이 되고 또 지역의 리더가 되면 우리 농촌은 엄청나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농업농촌이 바뀌면 정치는 말할 것도 없이 바뀔 것이고 그게 결국은 역전의 용사들이 또 다른 혁명의 길에 참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인 거죠. 그래서 도시의 남아 특별히 계획이 없으신 분들을 과감하게 농업농촌에 투신을 해주십사 이렇게 부탁을 드립니다.”
농업이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 인식과 합의를 위하여
이영수 회원이 바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해서 농업이 인정을 받는 사회이다. 농촌이 공익적 기능, 도시의 배후지로서 역할들을 해나가는 하는 것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으로 도시와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현재 농민들한테 가장 와닿은 말은 ‘농민도 국민이다’이다. 농민이 국민으로 대접 못 받는다고 느끼는 게 지금 농촌의 현실인 것이다. 한편 도시민들은 그만큼 많이 퍼줬는데 뭐가 부족하냐, 도시는 농촌보다 더 치열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갭(gap)이 과연 누구 때문인가, 이영수 회원은 결국 정치와 정책, 행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농업이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인식과 합의, 그런 제도적 보상, 그리고 정책적인 지원을 통해 농촌에서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이 농민운동에 제가 생각하는 또 다른 꿈입니다.”
새로운 10년을 준비하는, 그래서 다가오는 6월 출마를 계획하고 있는 이영수 회원에게 많이 바빠지시겠다고 이야기하자 깜냥에 맞게끔 하겠다고 답한다.
“깜냥에 맞게끔 해야죠. 학교 다닐 땐 내 몸이 부서지면 열사가 되는 게 아니냐는 심정으로 했는데 이젠 그럴 나이가 아닌 거 같아요.(웃음) 최선을 다하고, 제 인생의 후회 없이 사는 게 늘 내 판단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을 만큼 깜냥에 맞게 할 겁니다.”
농촌에 내려와 처음부터 농민회 활동을 하고, 지도자로 운동가로 활동했다면 어쩌면 배우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농부의 자세와 그 마음을 아는 이영수 회원은 누구보다 농민과 농촌의 현실을 잘 반영한 정책을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현장에서 피땀 흘리며 체득한 농사의 경험이 농부들을 위한, 그리고 도시와 농촌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정책의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6월에 밝은 웃음을 짓는 이영수 회원을 인터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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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진 _ 숭의여전 문창과에 입학, 문예창작보다 학보사 기사를 더 열심히 쓰고, 졸업 후 전국연합 기관지 ‘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신문 ‘건치신문’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후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하고 KOICA봉사단을 다녀온 후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인터뷰하고있다. (sejin3025@hanmail.net)
Last modified: 2024-01-21
현장에서 알차게 미래를 준비하는 이영수님을 격하게 응원합니다.
인터뷰에 공감합니다.
“농업이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인식과 합의, 그런 제도적 보상, 그리고 정책적인 지원을 통해 농촌에서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이 농민운동에 제가 생각하는 또 다른 꿈입니다.”
이영수회원님을 열렬히 응원합니다. 이영수회원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앞으로의 10년을 후회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면 또 다른 10년이 다시 이영수회원님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아무도 모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