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2:33 오후 118호(2019.10)

여는 글
주장하는 사람과 책임지려는 사람

홍형석 (나주시로컬푸드통합지원센터장, 농화학 97)

얼마 전 나주 원도심에 나주로컬푸드직매장 겸 카페를 열게 되었습니다. 나주시가 한옥마을 조성을 위해 샘플하우스로 지은 한옥 건물을 저희 센터에서 맡아서 운영하기로 했고, 지난 몇 달 동안 직원들과 함께 노력한 결과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 아내와 뜻밖의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원도심에 주민들이 저녁시간에 마땅히 모일 곳이 없으니 폐점시간을 늦춰 모임 공간으로 활용하면 좋지 않겠냐고 했고, 저는 직원들의 근무여건을 위해서 그럴 수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주시가 추진하는 로컬푸드, 푸드플랜 사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얘기합니다. 로컬푸드직매장에서 왜 소주를 팔지 않느냐는 요구부터, 수익성을 들어 지자체 예산이 과다하게 소요된다는 지적까지 다양한 주장이 제기됩니다. 아내와의 논쟁은 즐거운 일입니다. 하지만 사업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거나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일방적인 비난인 경우, 애써 노력하고 있는 이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힘이 듭니다.

저는 나주에서 로컬푸드센터장으로 어공(어쩌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여 지금은 나주시 출연기관인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제가 이제까지 가졌던 행정에 대한 태도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저에게는 세상이 단순명료했습니다. 옳고 그름이 명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적’과 ‘아’를 구분해 선을 긋고, 뜻한 바를 실현하기 위해 물리적인 실력행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에게 과거와 같은 단순한 세계는 없습니다. 어떤 가치관을 우선으로 누구의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도 상대적일 수 있으며, 우리 편을 넓히는 것은 중요하지만 선을 긋는 행위는 위험하고, 물리적인 실력행사는 일이 추진되는 실질적인 동력을 마련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제가 ‘주장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책임지려는 사람’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주장하는 사람’을 곳곳에서 봅니다. 특히 나주와 같은 좁은 동네에서 이들이 가지는 영향력은 행정을 향해 있습니다. 지자체 선거라는 정치구도와 결합된 주장들은 후보의 당락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이들의 목소리를 중시합니다. 몇 명 읽지도 않는 지역 언론 기사에 공무원들이 안절부절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몇몇 정책들은 본래의 취지와 방향을 잃어버리고 무의미한 행정업무로 전락하는 일도 생깁니다. 하지만 이미 구조화되어 개선이 어려워진 사업은 관성적으로 이루어지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또다시 무능력한 행정이라고 비난받는 결과로 돌아갑니다.

나주로컬푸드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저는 초기에 고집을 피웠습니다. 주변의 지적과 주장은 ‘잘 모르는 소리’로 치부하고, 제가 뜻하는 바대로 일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했습니다. 외부의 지적과 비난은 센터 내부의 결속력을 높였고, 직원들의 헌신을 이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사업의 규모가 커지는 지금 나주로컬푸드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농가와 소비자들의 ‘객체화’라는 문제입니다.

로컬푸드직매장의 운영 원칙은 센터에서 정해 농가들을 규제하는 제도일 뿐이며, 지역농산물의 소비 확대는 값이 싸고 좋을 때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많은 농가들과 소비자들이 나주로컬푸드를 좋아하고 센터의 운영 방침에 동의하고 있지만, 모든 운영 원칙을 이들과 함께 만들어 갈 수는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농가가 출하한 농산물의 진열기한 문제가 있습니다. 로컬푸드직매장은 농산물의 품목별로 매장에 진열하는 기간을 정해두고, 판매하고 남은 잔량은 농가가 직접 회수해 가도록 합니다. 엽채류 1일, 과채류 2일, 근채류 3일을 기준으로 당일수확 당일판매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열기한에 대해 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농가들은 기한을 늘리기를 원하고, 소비자들은 기한이 철저히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어느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문제들은 좋은 지적꺼리입니다. 한편 ‘책임지려는 사람’에게 이 문제는 출하농가의 참여를 확대하고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사안입니다. 이제까지 나주로컬푸드는 설득과 강제의 방법을 써 왔습니다. 필요성을 강조하고 지켜지도록 규제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제는 농가와 소비자들을 객체화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막는 한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농가들은 더 편하게 출하할 수 있는 규제가 느슨한 출하처를 찾기 시작하고, 소비자들은 로컬푸드의 가치보다는 상품성에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으며, 많은 지자체가 지향하고 있는 ‘민관거버넌스’가 바로 ‘책임지려는 사람’들을 함께 모아가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업의 필요성부터 추진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함께 나누어 ‘책임지려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주장만 하는 사람’의 설 자리는 줄어들 것입니다. 다함께 필요성과 어려움을 공감하고, 실질적인 추진을 위해 필요한 힘을 모으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누는 거버넌스가 이루어질 때 민주시민사회로써 우리 사회는 더욱 성숙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출하농가, 소비자, 행정, 중간지원조직이 함께 나주로컬푸드의 운영원칙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토론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더욱 확산될 수 있다면 진열기한에 대한 논란은 사라질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결정한 원칙을 반드시 지키기 위한 각자의 노력이 따라올 것입니다.

많은 지자체들이 민관거버넌스를 주창하지만 사실 형식적인 운영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행정의 주도성을 잃고 싶지 않은 공무원이 거버넌스 기구를 형식적으로 운영하거나,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위원들이 얼토당토 않는 주장을 늘어놓는 등 민주적인 운영이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어쩌면 ‘주장하는 사람’들의 영향력은 다수 시민을 객체화하는 기존의 행정의 태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행정은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기보다 ‘주장하는 사람’들을 관리함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주장’만으로는 지역사회를 유지할 수 없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함께 ‘책임’지는 것이 지역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일 것입니다. 부족한 수준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다같이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거버넌스를 만들어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저희는 ‘먹거리위원회’를 통해 나주로컬푸드를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기구에 머무르지 않고 출하농가들의 주체적인 조직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소비자들이 참여할 공간을 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주장하는 사람’들을 ‘책임지려는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앞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주장만 하는 사람’에게 사업의 성과는 누군가의 치적이 되지만, ‘책임지려는 사람’에게 성과는 지역사회가 함께 나누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홍형석_농사를 짓지 않는 농민운동가가 되기 위해서 오늘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대외협력부장,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연구원으로 서울 생활을 하다가 잠시 괴산을 거쳐 지금은 나주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렸습니다. 완주를 모델로 시작했지만 나주만의 로컬푸드를 만들기 위해 나주시로컬푸드통합지원센터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Last modified: 2022-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