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양 (이정양 기술사 컨설팅 대표, 농학 86)
‘더부살이’란 사전에 ‘남의 집에 얹혀사는 일, 또는 그 사람’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서 나는 그 의미를 조금 더 크게 적용해서 학교, 회사, 삶 전체까지 확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진짜 더부살이
전남 장흥군 대덕면에서 태어난 나는 낳아주신 생모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여섯 살 많은 누이의 기억으로는 내 나이 세 살쯤에 동생이 될 수도 있었던 아이를 낳다가 아이도 죽고 생모도 돌아가셨단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님은 장사를 하신다며 집을 떠나시고 아홉 살 많은 형과 나는 큰집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하고 누이는 어찌어찌 서울로 식모살이하러 갔단다.
장흥에서의 기억은 별로 없다. 어렴풋이 형들과 함께 개울에서 물놀이한 것과 마당 앞에 떨어진 감을 주워 먹었던 것 정도뿐이다. 특이한 경험은 똥통에 두 번이나 빠졌던 것인데, 실제 내가 기억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른들이 하도 자주 말해서 만들어진 기억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족 이야기 : 나는 생모의 젖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서인지 비염이 아주 심하다. 두 아들도 비염이 아주 심하다. 아내와 딸은 비염이 없다. 두 아들도 젖을 먹지 못하였다. 아내는 잘 모르지만 딸은 확실히 젖을 잘 먹었다. 젖을 제대로 먹은 것과 먹지 않은 것이 우리집 비염에 상관이 큰 것 같다.)
내 나이 여섯 살 쯤에 아버님께서 군산에서 나를 정성껏 길러주신 어머님을 만나셨다. 어머님께서 아이들을 돌보시겠다고 하여 가장 먼저 장흥에서 나를 데려 오시고 얼마 뒤에는 수소문하여 나를 끌고 서울로 가서 누나를 데려 오셨다. 어머님께서 가족을 만들어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덟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께서 나를 초등학교에 보내려 하였더니 나란 사람은 호적에 존재하지 않았다. 애를 낳다가 죽은 생모와 아이, 허약한 나. 아버님은 나를 호적에 올리는 것도 잊고 고향을 떠나셨나 보다. 길러주신 어머니의 오빠, 즉 외삼촌께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나를 호적에 올리고 다음 해에 겨우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대학은 재수하지 않았는데, 초등학교를 재수하여 들어갔다.
2. 학교 더부살이
초등학교를 재수한 것이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의 한 살 차이는 지적이나 체력적으로 거의 상관이 없거나 오히려 역전되기도 하지만 8, 9세 때의 한 살 차이는 상당히 큰 것이었다. 싸움에는 거의 지지 않았다. 학습에선 선행학습이 따로 없어서 3학년까지는 하위권이었으나 3학년 말부터는 상위권에서 놀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 한 살 차이로 인하여 나는 깜냥에 서울대학교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학교 더부살이 문제는 4학년이 되면서 생겼다. 한창 학생 수가 늘어나다보니 아예 학교를 두 개로 나누는 분교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를 지어놓고 분교를 한 것이 아니라 분교를 하고서 학교를 짓다보니 1학년부터 3학년까지는 다니던 군산서국민학교에 더부살이를 하고, 4학년부터 6학년까지는 그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군산국민학교에서 더부살이를 하였다. 다른 학교에서 더부살이를 한 4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학교생활은 조금 고달팠다. 원래 학교의 학생들은 툭하면 우리를 건드렸고, 싸움이 생기면 먼저 혼나고 더 혼났다.
특히 원래 학교에서 고아들만으로 이루어진 반의 교실을 사용한 4학년이 받은 설움은 조금 더 컸다. 이듬해에 학교가 지어져서 5학년부터는 새 학교로 다녔는데, 그곳에서는 중노동에 시달렸다(나경원 아버지의 학교가 생각난다). 흙을 퍼 날라서 동산과 화단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심느라 많은 수업시간을 빼먹었다. 농업적인 마인드와 기술력의 대부분은 그때에 득템한 것 같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겨울에 어느 중학교에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뺑뺑이를 돌려서 배정된 학교가 하필이면 불이 난 바로 그 학교, 군산중학교였다. 3학년은 불타지 않은 나머지 교사를 이용하였지만, 2학년은 옆에 있던 군산고등학교에서 더부살이를 하였고, 1학년은 같은 국립학교라는 이유로 많이 떨어져 있던 군산여자고등학교에서 더부살이를 하였다. 중학생은 수업시간이 적어 먼저 하교를 했는데, 청소를 하던 고등학교 누나들이 우리를 놀리곤 했다. 한창 민감하던 때에 누나들이 ‘고추 따먹는다’거나 ‘이쁜 얼굴 자세히 보자’며 고개를 들라 하고 놀렸다. 아직까지도 아내와 딸을 제외한 여자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인 것 같다.
고등학교 때는 딱히 더부살이 기억이 없다. 깜냥에 공부를 부지런히 하기는 했지만 대입시험 성적이 조금 저조했다. 원래 목표로 했던 서울대학교 농화학과를 포기하고 4년 장학금을 준다는 아주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원서를 내려고 학교장의 직인을 받으러 갔더니 담임이 원서를 찢어버렸다. 제법 꼬라지가 있던 나 이정양은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수원 아주대학교로 가서 원서를 사서 내려갔다. 혹시 또 찢을까봐서 3장이나 샀다. 원서를 다시 써서 당당하게 교무실에서 담임을 찾으니 교장실에 계시다고 했다. 교장실 앞에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볼품없이 조그만 교장선생님께 무지하게 혼나고 있었다. 거의 따귀를 맞기 일보직전 같았다. AC하고 내가 쓴 원서를 내가 찢고 담임이 원하는 대로 서울대학교 농학과에 원서를 제출했다. 나는 서울로 가는 줄 알았는데, 1학년만 서울에서 다니고 2학년부터는 수원으로 간다는 것이다. 소원을 풀었다. 수원으로 가는 소원은! 10년 후에 결혼하게 된 아내가 있던 수원으로!
3. 군대 더부살이
86년도에 제법 운동을 하면서도 한 번도 잡히지 않았고, 87년에도 잡히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내 몸을 잘 건사하였는데 치명적인 상황을 피하지 못하였다. 출신 고등학교에서는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면 4년간의 학비를 지원하여 주었다. 그런데 장학금을 주며 기껏 대학을 보내주었더니 공부는 하지 않고 함운경 등 일부학생들이 큰 사건만 치니(?) 장학금 조건이 학점 2.7 이상으로 정해졌다. 잦은 수업거부와 시험거부로 2학년 1학기 평점이 2.3점이 되어 등록금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6.29를 지켜보고 학비를 벌기 위하여 바나나하우스 짓는 알바를 하러 제주도로 갔다. 하지만 유난히 그해 장마가 길었던 탓에 일을 거의 하지 못하고 2학기를 휴학하고 말았다.
12월 3일에 입대하여 500명 정도가 전주 35사단에서 훈련을 마쳤다. 50명은 특수부대로 차출되고 나머지 450명은 전경으로 배치되었다. 자대로 끌려간 곳은 신월동 올림픽 경비대. 88올림픽 경비를 위한 한시적인 부대였다. 신월동에서 영어공부도 가끔 하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연세대로, 여의도 국회로 데모 막으러 가기 바빴다. 6월부터는 개포동에 임시막사가 지어져서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다음에는 군생활을 따로 한번 얘기하고 싶을 정도로 많은 이동과 사건이 있었다.
싸이클경기장 근무, 펜싱경기장 지원, 마라톤경기 배후근무 등 많을 일을 하다가 신월동으로 복귀했다. 겨울을 나기 전쯤인가 부대가 해산되어 서오능에 있던 201전경대로 전입을 들어갔으니 이 또한 더부살이 생활이었다. 전경 507기로 입대는 고참이지만 518기 후임이 내무반장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 중대 무전병을 했던 전력으로 소대 무전병을 하면서 큰 어려움 없이 제대를 할 수 있었다. 군대에서의 더부살이 덕에 나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과 나보다 어려운 사람, 나보다 어린 사람과 어울리는 능력이 많이 생긴 것 같다.
4. 신혼 더부살이
1993년 졸업을 앞두고 아내와 결혼을 약속할 당시 나는 집을 구할 능력이 없었다. 아내가 500만원 처제가 500만원씩 모아서 신혼집을 구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장모님께서 그래도 집은 남자가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시기에, ‘저는 지금 그럴 능력이 없으니 능력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던가 아니면 아내를 포기하겠다’고 하였더니 그냥 살라고 하셨다.
수원 아주대학교 앞 반지하방에서 아내와 처제의 집에 옷가방 하나와 책가방 하나, 이불보따리 하나를 들고 들어가 더부살이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분위기로 인하여 더부살이가 주인행세를 하며 살았다. 아내는 내가 옷가방과 이불보따리만 가져왔다고 얘기를 하는데, 아직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나는 책가방을 버리지 않았을 터. 세 개가 맞다고 나는 우긴다. 아마 이불보따리를 버리고 갔을지도 모르겠다. 신혼집에 들어갔으니까.
5. 직장 더부살이
1994년도에 전남농업기술원 작물연구과에 발령받아서 나주로 내려갔다. 나주에서는 사무실 이사를 무척 많이 다녔다. 지도국은 당연하고 같은 연구국에서도 원예과, 식물환경과, 경영과는 거의 자리 이동이 없었는데, 유독 작물과만은 1층에서 2층으로, 3층으로, 다른 건물로, 더 먼 다른 건물로, 아예 본 건물과는 떨어진 시험포장 건물로 이사를 참 많이도 다녔다.
급기야 2002년에는 나주에서 고흥으로 발령받아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 뒤 완도로, 보성으로 갔다가 명퇴를 하였다. 몇 년 쉬다가 공부를 하여 아예 고흥군농업기술센터에 다시 취직을 하였으나 작년 12월에 그만 두게 되었다.
6. 아내에게 더부살이 중
2012년 명퇴를 할 때에는 아내가 많이도 울고 뜯어 말리고 난리였다. 하지만 작년에 그만 둘 때에는 아쉬워하기는 하여도 많이 의연해진 것 같았다. 보금자리 대출금 때문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명의를 내 앞으로 해놓았지만, 이집은 아내의 집이려니 하고 더부살이 한다 생각하고 살고 있다. 얼마 전 이 생각을 한 뒤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느 누구는 내가 무척 대책 없이 산다고 나무랄지 모르겠으나, 큰 욕심 없이 살다보니 나는 편안하다. 그 욕심 없음으로 인하여 아이들이 남들보다 조금 못 누리고 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의 욕심 없음으로 인하여 큰 스트레스 없이 산 것 같아서 나는 좋다. 아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그건 그들의 인생이니.
이정양_두 차례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와포햇살영농조합법인에서 연구부장으로 근무하며 중학교 텃밭교육 및 귀농인과 청년농업인 컨설팅을 했습니다. 종자기술사, 농화학기술사, 시설원예기술사 자격증과 천문지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 9월을 끝으로 와포햇살영농조합을 나와 제 이름을 건 기술사 사무소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Last modified: 2022-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