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준 (경기방송 편성제작팀장, 농화학 88)
***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과학은 실재하며, 8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확증된 사실관계들에 충실하였습니다.
#12. “브라더“
3시간 뒤 서울대학교 수의대 연구동. 도슨 교수를 태운 밴이 도착하자 건물 앞에 나와 있던 강한우 교수 일행이 머리 숙여 정중히 맞는다. 수의대 학장도 직접 나와 인사를 나눈다. 도슨 같은 석학이 제 발로 찾아오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슨은 그 자리에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영장류 세포 복제는 불가하다는) 제 논문을 보셨을 테죠?”
그러자 다들 난감하다는 표정. 당사자에게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를 그 상황에 강한우가 입을 연다.
“사실 저희끼리 걱정이 많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저희가 대가의 이론과 맞서는 꼴이 됐는데 과연 우리가 학계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그러자 도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빙긋 웃는다.
“UC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할 때 나의 지도교수가 늘 하던 말이 있죠. Nobody Knows. 과학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니 우린 열심히 연구하고 실험해야 한다…….”
아무도 모른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도슨을 존경어린 눈빛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 때 도슨의 한 마디.
“NT(핵이식) 과정을 볼 수 있나요?”
강한우는 놀랐다. 핵심을 정확히 짚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제줄기세포의 성패는 세포배양이 아니라 NT(Nuclear Transfer), 즉 인간의 체세포를 여성 난자의 세포핵 자리에 얼마만큼 정확히 이식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런 NT를 보고 싶다는 말은 다시 말해, 너희의 핵심기술을 까보라는 말이었다.
“여깁니다.”
“?”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간이실험실 앞에서 도슨은 깜짝 놀라 묻는다.
“창고인가요?”
그 말에 강한우의 얼굴이 붉어진다.
“아……, 여긴 창고가 아니라 랩(실험실)입니다. 실험공간이 부족하다보니……, 하지만 안에 들어가 보시면 갖출 건 다 갖췄습니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도슨은 슬쩍 농담을 던진다.
“적어도 보안면에선 완벽하군요. 아무도 이런 곳에 줄기세포가 있다고는 생각 못할 테니까…….”
그렇게 여유 있던 도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것은 연구원들의 실험 장면을 보면서부터다.
“잠깐만, 혹시 32배속으로 화면을 빠르게 돌리고 있나요?”
도슨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구팀의 체세포 핵이식 작업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요. 지금 보신 게 저희 연구원들 평균(속도)입니다.”
강한우는 눈으로 현미경을 보면서 손으로 마이크로 피펫을 조작하는 연구원들의 핵이식 작업 과정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렇게 난자에서 세포핵을 꺼낸 다음, 체세포를 난자에 집어넣습니다. 형광물질을 집어넣었기에 염색 사진을 판독하면, (찰칵) 이렇게 정상적으로 들어갔음이 확인됩니다.”
“어메이징!”
도슨은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군요. 프로페서 강,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미국에서 최고의 숙련도를 자랑하는 연구원도 핵이식 하나 하는데 6-8시간입니다. 근데 이걸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도슨은 휴대폰을 꺼내 연구원들의 핵이식 작업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그리고 그 영상을 누군가에게로 전송했다.
“셀(줄기세포)은?”
“이쪽으로 오시죠.”
강한우는 질소탱크 안에 냉동 보관된 NT-1(1번 줄기세포)을 해동시켜 도슨에게 보여줬다.
“지난 2월 9일 NT(핵이식)를 실시해서 복제배반포가 만들어졌고 2월 17일 씨딩된 다음 콜로니(초기줄기세포)가 형성돼 안정적으로 계대배양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세포에 대한 각종 검사기록은 여기 있습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도슨은 계속 찍었다. 줄기세포의 배양상태나 염색체 사진, DNA 검증자료 등을 살펴보면서도 계속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갑자기 이런 단어가 떠오르는군요. Magic. 당신들은 마법사 같습니다. 허름한 실험실 안에 몸을 감추고 있던 마법사…….”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희는 그저…….”
뜻밖의 찬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강한우에게 도슨은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프로페서 강, 괜찮으시다면 내가 돕고 싶소. 당신들이 세계의 중심에 서서 실력발휘 할 수 있도록…….”
그 후 도슨은 한국에서 하루를 더 체류하며 강한우와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이 어떻게 지금의 기술을 갖추게 됐는지, 또 앞으로 꿈꾸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날이 밝아올 무렵 와인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어제까지 도슨의 해가 떴다면 오늘부터는 강한우의 해가 뜰 것이요, 브라더(형제여). 우리 사이에 더 이상 태평양은 문제가 아니요.”
도슨은 두 팔 벌려 강한우를 안았다. 그 따뜻한 눈빛과 말투, 양손의 온기에 한우는 감동했다.
“꿈만 같습니다. 국제학회에 가서도 선생님의 발표를 먼발치에서만 보고 곁에 다가서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의형제가 될 줄이야…….”
“프로페서 강, 과학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흐뭇한 미소를 짓던 도슨은 숙소로 들어가며 툭,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 참, 당신네 연구원들을 미국으로 보내줄 수 있습니까? 우리 팀의 원숭이 복제 연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13. 연습생의 꿈
2003년 11월, 인천공항 출국장. 강한우 교수가 출국하는 도슨 교수와 두 명의 연구원들을 배웅하고 있다. 도슨은 강한우를 따뜻이 안아주며,
“<사이언스>에서 이 논문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루는 것 같소.”
“교수님께서 신경써주신 덕분입니다.”
“무슨 소릴, 오히려 내가 감사드릴 일이오. 마법사를 무려 두 명씩이나 우리에게 보내주시니…….”
“저희야말로 영광입니다. 원숭이 복제연구를 직접 도울 수 있다니……. 저희 연구원들 부족한 게 많아도 잘 살펴주십시오.”
한우는 두 명의 연구원, 현상환 박사와 박영순 연구원의 손을 잡으며,
“현 박사, 영순이 잘 챙기고…….”
“걱정마십쇼, 교수님. 영순이 실력이면 거기서 날아다닐 겁니다. ^^ 근데 이 순둥이는 걱정이 많은지 계속 한숨만 푹푹 쉬네요…….”
“제가 언제요.ㅠ”
얼굴 한가득 걱정이 태산인 박영순 연구원을 보니 강한우 교수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영순아,”
“네, 선생님.”
“처음에는 영어도 서툰 네가 낯선 미국 땅에서 녹록치 않을 거야.”
“그게 걱정이에요. 너무 설레는데 걱정돼서 잠도 안 오고…….”
“근데, 이거 하나는 명심하거라. 넌, 그 자리에 설 충분한 자격이 있는 아이라는 걸. 지금껏 해온 대로 열심히 노력하면 거기서도 최고가 될 거라는 걸…….”
“선생님…….”
박 연구원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순간 지난 일이 떠오른다. 지방대 출신의 연습생 신분으로 강한우 교수의 실험실에 다니던 시절, 과사무실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훔쳐본 장면. 학과장 교수는 강한우에게 왜 지방대나 전문대 출신을 그리도 많이 뽑느냐고 힐난하고 있었다.
“강 교수, 뭐하나 물어봅시다.”
“예, 학과장님.”
“대학원생 뽑을 때, 강 교수 방에 꼭 가야겠다는 서울대 학부생들이 줄을 서있는데, 왜 굳이 지방대나 전문대 출신 애들을 뽑는 거요?”
“최근엔 고졸 출신도 뽑았습니다.”
“그러니까……, 뒷말 도는 거 몰라요? 강한우는 실력 대신 빽이나 인맥으로 뽑는다고.”
그러나 한우는 담담하기만 했다.
“설령 누가 감사 찌른다 해도 전 당당합니다. 빽도 인맥도 아닌 교육자의 신념으로 뽑은 거니까요.”
“교육자의 신념? 설마 내 앞에서 훈계하는 건 아니겠죠?”
“학과장님, 더 잘 아시겠지만 어느 조직이든 ‘순혈주의’를 고집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서울대끼리만, 스카이(SKY)끼리만, 그것도 모자라 KS(경기고-서울대)끼리만, 그런 끼리끼리 문화에서 어떻게 21세기 창의적인 사고가 나오겠습니까?”
“그럼 전문대 애들이 창의적일까?”
“전 서울대생만 창의적이고 똑똑한 학생들 아니라고 봅니다. 능력과 열정이 있어도 집안 형편 때문에 기회를 못 잡았거나 혹은 뒤늦게 학구열에 불탄 학생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그들을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과학도로 성장시키는 게 교육자로서의 소명이라고 봅니다.”
“(언짢은 표정으로) 그래서 지방대 출신, 청소나 하던 연습생한테 중책을 줬나요? 서울대 출신한테는 그 친구 보조시키고?”
“영순이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 녀석 보통 아닙니다. 제가 두 번이나 대학원 시험 떨어뜨렸는데, 기어코 해보겠다며 청소부터 궂은 일 다해가면서 실력을 갈고 닦아온 녀석입니다. 그런 친구도 열심히 하면 미국 유학 가서 한 명의 학자로 성장할 수 있단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게 제 자부심입니다.”
그 말에 영순의 눈에선 왈칵 눈물이 나왔다. 숨죽여 어깨를 들먹이며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갔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 미국 유학을 가고 있다. 출국장을 빠져나가던 영순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고, 강한우는 활짝 웃으며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노광준_ 별명 ‘노진구’. 도라에몽에게 늘 민폐만 끼쳐 만화사상 최악의 캐릭터로 손꼽힐 만큼 띨띨하고 존재감 없던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우연히 라디오 피디가 되어 드라마 ‘도깨비’의 지은탁 양과 동종업계에서 일하고 있음. FM 99.9MHz 경기방송 편성제작팀장. 언젠가 농촌에 살고픈 닉네임 ‘시골피디’. (pdnkj@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