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란 (전 평택여고 교사, 후원회원)
9월 6일에 전북 장수로 여행을 떠났다. 서울의 어느 부촌 사람들의 여행길에 지인이 초대를 해 함께 가게 됐다. 사과 축제와 한우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장수 특산품인 맛있는 사과와 한우를 산지에서 눈으로 확인하고 좋은 물건을 비교적 싼 가격에 구입하고 싶었기에 따라나선 길이었다.
“안전벨트 꼭 매세요. 안전벨트 매지 않았다가 사고 나면 보상도 못 받아요.”
여행은 낯선 곳에 가서 새로운 풍경을 보고 힐링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다. 그와 함께 별일 없이 집에 돌아와야 한다는 약간의 불안감이 있기 마련이다. 모임 회장의 이 같은 말에 안전벨트를 매고 관광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얼마가 지난 후였다. 버스 안은 트로트 메들리를 크게 틀어놓고 나이가 적지 않은 할머니들이 나와서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노래 소리는 귀청을 뚫고 있었다. 십대부터 클래식 마니아인 내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들어야 하는 트로트는 글자 그대로 고문이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괴로운지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였다. 안전을 위해서 안전벨트를 꼭 매라고 하던 회장은 춤추기를 독려하고 있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게 운전이다. 노래 소리는 귀청을 뚫고 할머니들은 버스에서 춤추느라고 쿵쾅거리고 있는데 과연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다. 출발 전에 안전을 위해서 안전벨트를 매라고 하던 회장이 운행 중인 버스에서 춤을 추라고 하는 이 모순! 어이 상실이었다. 같은 사람 맞아?
태풍 ‘링링’으로 인해 사과 축제와 한우 축제가 취소됐다는 얘기에 실망이 컸다. 그래도 어느 과수원과 연결이 되어 사과 과수원에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햇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과들은 앳된 소녀의 볼에 피어오른 수줍음처럼 붉게 타올랐다. 산지에서 맛보는 사과의 맛은 터질듯이 싱싱했다. 초가을 조생품종인 홍로의 맛이 싱그럽고 달콤했다.
과수원에서 다시 한 번 부촌 사람들의 민낯을 볼 수 있었다. 과수원의 사과를 계속 따서 가방이 불룩해지도록 집어넣고 호박을 따고 호박잎을 마구잡이로 따고 있었다.
그들을 말리느라고 누군가 한마디 했다.
“그거 몇 천 원이면 사는데…….”
“이렇게 악착같이 하지 않으면 K 지역에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 중 하나가 이렇게 대꾸했다 한다. 그렇게 해야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절대로 부자 같은 건 되고 싶지 않다.
“사과 따지 마세요!” 외쳐대는 내 목소리는 허공 중에 공허했다. 그건 엄연히 도둑질이다. 사과 한 알이, 호박 한통이 그저 열릴 리가 없다. 농부들은 봄부터 씨를 심고 비료를 주고 풀을 매주었다. 가물면 어쩌나! 비가 많이 오면 어쩌나! 애면글면 자식 키우듯 일 년 내 가꿔온 것이 농작물이다.
“서울 부촌 사람들이라 피부톤이 달라요.”
동충하초 산지에서, 건강기능 매트 생산공장 교육장에서 현지 사람들에게서 듣던 찬사였다. 그 서울 사람들이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남의 농산물을 탐내다니. 그건 서울 사람들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짓이다.
수선화에게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회장에게 시낭송을 하겠다고 제의하고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를 낭송한 후 한마디 했다.
“안전을 위해서 버스에서는 안전벨트를 매야합니다. 춤을 추고 싶으면 날 잡아서 노래방에 가서 하시면 됩니다. 농부들은 농작물을 키우기 위해 봄부터 땀 흘리며 살아왔습니다. 서울사람들의 이미지를 위해서도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농작물을 탐내는 일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시낭송 후에 한마디 하는 내게 회장은 뒤에서 말렸다.
“그냥 시낭송만 하세요. 다른 얘기는 말고.”
그건 아니죠. 부촌 사람들의 민낯에 일침을 놓기 위해 시낭송을 한 거거든요.
평생 그렇게 살아온 그들이 과연 내 얘기에 바뀔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다들 입 다물고 있어야만 하는 건가?
잡균이 들어간 포도는 포도주가 되지 않고 부패해 버린다. 나이가 들어서 썩은 포도가 되느냐 맛있고 향기로운 포도주가 되느냐는 나의 선택이다.
“나이 들수록 후숙되어 기품 있고 우아한 노년이 되고 싶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랑 가느냐도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하루였다.
박애란 _ 선생은 서둔야학 시절 야학생과 교사로서 맺은 인연을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기며 본회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평택에서 어릴 적 꿈이었던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은퇴하였다.
Last modified: 2022-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