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선구자 김상진

522 사건

점심시간이 막 끝나는 무렵이었다.

쿵쿵.
어디선가 북소리를 시작으로 징, 꽹과리, 장구 소리가 한데 섞여들려오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종종 풍물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대개 그런 소리는 방과 후에나 들려오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평소의 가락이나 장단과 달리 매우 다급하고 격정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교실로 들어가려던 학생들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교정 곳곳에 되도록 눈에 안 띄게,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선명하게 눈에 띄는 사복 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그들이 한쪽으로 우 몰려갔다. 중앙도서관 쪽이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 계단을 오르던 학생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건물 안에 있던 학생들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봄바람에 황사가 잔뜩 묻어왔다.
풍물소리는 점점 커지고, 간간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모여라! 모두 모여라!”
학생들은 이제 우루루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있던 학생들 마저 창가로 죄 몰려나왔다.
3동 앞에서 팽팽하던 긴장감이 막 깨진 직후였다.
하얀 플래카드가 햇살에 반짝 빛났다.
“의로운 죽음 암장이 웬 말이냐!”
누군가가 핸드마이크로 플래카드에 쓰인 글귀를 읽었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절규요 고함이었다.
주저하던 학생들이 후렴구를 따라 외쳤다.
“웬 말이냐!”
“웬 말이냐!”
계단에서는 벌써 한바탕 육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깨를 겯고 함성을 내지르는 학생들과 그들에게 달려들어 전진을 가로막는 사복차림의 사내들. 풍물잡이들은 더욱 힘차게 손을 놀렸다. 뒤늦게 교직원들이 몰려나왔다.
“안 돼, 안 돼!”
“다쳐, 다친다구.”
모여드는 학생 수는 순식간에 늘어났다. 이제 사복과 교직원의 힘만으로는 학생들을 제지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복들 중에서 누군가 무전기에 대고 쉴 새 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마 지원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핸드마이크 소리가 삑삑거리더니, 이내 제 소리를 찾았다.
“오늘, 우리는 한 의로운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운동장과 계단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어림잡아 몇 백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그 사이에도 학생들은 꾸역꾸역 늘어났다. 근래 들어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모인 적은 졸업식 등을 빼고는 거의 없었다.
“이제부터 지난 4월 12일 숨진 고 김상진 학우의 장례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제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유세차…….”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끌어내!”
“막아!”
사복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소복으로 상주 복장을 한 학생이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학생들이 사복들을 붙잡았다. 서로 밀고 밀리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 다른 학생이 핸드마이크를 받아들었다.
국문학과 4학년 김도연이었다.
그는 미리 준비해온 유인물을 읽어나갔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그는 침착하게 다 읽어내려 갈 수 있었다. 이어 키가 작은 한학생이 앞으로 나섰다.
영문학과 4학년 김정환이었다.
그가 낭랑한, 그러면서도 힘찬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는 것은 ‘4월진혼가’라는 제목이 붙은 ‘조시’였다.

 

벌거벗은 함성이 들려오리라
억눌림 속에서 오색 환희와 해탈의 눈물이 흐르고
일어나는 소리, 아, 아, 맨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리라.
너는 순진한 피 한 방울로 오려마
서러운 이야기들 뒤에다 두고
그때에 너는 알몸으로 오려마

 

분위기는 금세 숙연해졌다. 눈시울을 붉히는 학생들……. 한동안 현장을 봉쇄하려던 사복들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친구여! 네가 버린 것은 생명이 아니다
굶주림에 떨며 연명해 가던 끈질긴 목숨이 아니다
어린 회상의 하늘에 서슬 푸른 칼을 갈며
비가 내리면, 흐느낌처럼 비가 내리면
친구여! 내가 우는 것은 이제
텅 비인 설움이 아니다
할배 계신 무덤가엔 달이 뜨지만
네가 돌아간 사막엔 종일 태양이 끓어오르리라
끓는 한처럼 끓으리라
타는 정열처럼 타리라

 

잠시 후 떨리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장례식은 이제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천희상(역사교육학과 4학년)이 조사를 읽었다.
“동지여! 그토록 어렵게 그토록 숨막히게 죽음으로 그대는 사랑을 완성했다. 척박한 이 터전을 붉디붉은 한 점 피로써 그대는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드디어는 그대 동학년 곰나루에서 비롯된 민중사의 현단계를 혼신의 힘으로 뛰어넘었다.”

 

학생들은 고개를 숙인 채 ‘동지’라고 불려진 학우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늘 가까이 있었던것만 같은 학우. — 강렬한 어휘로 이어지는 조사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산물임을, 두고두고 내려오는 역사의 가르침을 우리는 손에 손을 움켜쥐고 온몸으로 터득해야 하는 것들은 결코 강물에 꺾이지 않으며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언젠가는 모두 함께 일어나 덩실 춤을 추면서 맞이하리니.”

 

천희상이 고개를 들고 손을 들었다.
그는 목청이 터져라 마지막 부분을 외쳤다.
“아, 김상진 동지여, 믿으라! 다시금 터져 나올 그 눈물겨운 함성을, 그 위대한 민중의 승리를 믿으라!”

 

이어 박연호(교육학과 4학년)가‘반독재선언문’을 낭독했다.
낭독이 끝났을 때, 현장은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애국가가 들려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노랫소리는 금세 광장 하늘을 뒤덮었다. 여기저기 애써 울음을 삼키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기어이 눈물을 흘리는 학생도 있었다.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도 애국가 소리는 저만큼 철쭉꽃으로 붉게 물든 관악산 봉우리까지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날 시위는 장례식도 없이 화장되어 한 줌 재로 변한 학우 김상진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는 김상진 학우가 숨진 뒤 곧 열릴 예정이었지만,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차질이 빚어졌다.

 

4월 30일, 10년 넘게 끌어오던 월남전쟁(베트남전쟁)이 마침내 사이공 대통령 관저에 월맹군이 진주함으로써 끝이 났다. 박정희 정권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들은 월남의 공산화를 빌미로 매일같이 관제 반공궐기대회를 열어 국민들을 위기감 속으로 몰아넣었다.독재정권이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거세어질 때마다 항용하던 수법이었다. 그래도 학생들과 재야 민주세력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5월 13일 부랴부랴 대통령 <긴급조치제9호>를 선포했다. 이미 존재했던 여덟 개의 긴급조치조차 그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초강경 조치들이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나) 집회, 시위, 또는 신문·방송·통신 등 공중전파수단이나 문서·도서·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다) 학교당국의 지도·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의례적·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관여 행위
(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그렇지만 민주주의의 제단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내바친 학우앞에서 더 이상 두려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서울대 문리대 가면극연구회의 장만철(장선우)과 문리대 김도연, 사범대 야학문제연구회의 박연호와 천희상 등이 주동이 되어, 마침내 5월 22일 고 김상진학우의 장례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이날 시위는 추상같은 긴급조치 제9호가 발표되자마자 터져 나온 최초의 대규모 시위였을 뿐만 아니라, 삼선개헌과 유신을 통해서라도 악착같이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당국은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이었을까. 경찰은 집회를 마치고 교문 앞으로 몰려나오던 시위대를 강력하게 진압했다. 이어 교내로 진입, 강의실까지 샅샅이 뒤지며 시위 가담 학생들을 붙잡아갔다. 이날 서울 남부경찰서로 연행된 학생은 80여 명이었다. 그 중 56명이 구속되었고, 20여 명이 긴급 수배되었다. 그중 김근태를 비롯, 몇 명에게는 현상금까지 내걸렸다.
훗날 세칭 ‘오둘둘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날 시위의 여파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서울대 한심석 총장이 사임했고, 시위를 초동 진압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치안본부장과 남부 경찰서장이 경질되었다.

 

이날 시위는 긴급조치가 아니라 그 어떤 잔인한 탄압이 이어져도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한 투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그 선봉에 고 김상진 열사가 있었다.

 

출처 : 시대의 불꽃4 김상진 중 pp 13~23

김남일 (2003). 시대의 불꽃4_김상진. 도서출판 오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