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현 인터뷰(농학, 93)
코이카(KOICA) 볼리비아 사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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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선한영향력을 행사하는 삶
부제 : 대학시절 가졌던 모두가 잘 사는 사회건설의 글로벌 버젼이 제가 하는 일이죠.

 

발문 :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최빈국에서 원조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나라이다. 해방 이후 90년대 후반까지 약 120억 달러의 공적개발원조를 받았으며, 특히 1946-1980년까지 미국의 가장 많은 원조를 받은 수원국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 제공된 원조는 긴급구호부터 구조조정 프로그램까지 시대적 요구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면서, 경제 사회 개발에 일조하였다.
공적개발원조를 받는 가운데 1963년부터 원조공여국으로 활동 시작했다. 한국의 성공적인 경제발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에 대응하여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원조자금에 의한 개발도상국 연수생의 초청사업을 시작으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유엔기구 등의 자금을 지원받아 개발원조를 실시하였으나, 점차 우리 정부 자금에 의한 원조규모가 확대되었다.
1991년에는 무상원조 전담기관으로 외무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을 설립하여 개도국에 대한 본격적인 원조제공의 기반을 구축. 정부 차원의 대외무상협력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1991년 8개였던 사업은 2021년 312건으로 늘어났으며 예산도 174억 원에서 9,722억 원으로 56배 증가했다. 해외 사무소도 6개에서 44개로 늘어났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코이카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주요 공여국과 비교할 때 한국의 공적개발협력(ODA) 규모는 아직 부족한 수준이다. 손혁상 코이카 이사장은 언론매체 인터뷰를 통해 “외국은 사업을 발굴하기 위해 컨설턴트를 많이 고용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며 “코이카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문가가 돼 통합적 접근을 통해 사업의 질을 효과적으로 높여야 경쟁력이 생긴다”라고 강조했다.
전문가가 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직원으로 개발도상국 개발협력 최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문. 볼리비아 코이카 사무소 소장 김식현(농학 93)과 온라인 비대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코로나19에도 계속되는 일상

 

먼저 팬데믹(pandemic) 속 해외 생활에 대한 걱정에 안부부터 물었다.

“코로나19가 빈부격차를 더 늘리고 있죠. 가난한 사람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은 코로나19로 죽나 굶어 죽나 별 차이가 없거든요. 코로나19에 걸리는 건 운이고 굶어죽는 것은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냥 일상적으로 사는 거죠.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발리 같은 관광지 경우는 락다운(Lockdown)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제가 볼리비아에 오기 전에 근무했던 곳이 동티모르인데 동티모르는 2002년에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인도네시아 끝단에 있는 조그만 나라입니다. 동티모르에서 유일하게 나갈 수 있는 통로가 발리인데 발리가 락다운이 되니까 바깥에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죠. 그래서 유엔에서 챠터(charter)한 말레이시아 항공을 타고 코알라룸푸로 가서 상업기를 타고 한국이나 다른 곳을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볼리비아 올 때도 비행기를 다섯 번을 갈아타고 이박삼일이 걸려서야 올 수 있었죠.”


믿을 수 없는 코로나19 통계, 인접 국가로부터의 위험

 

“볼리비아는 코로나19로 인한 통제는 별로 없습니다. 여기는 마스크만 쓰면 통제 안 하거든요. 자기가 리스크를 안아야지 어떻게 무슨 수로 국가가 다 책임지겠냐는 마인드예요. 볼리비아는 남미의 중심에 있는 내륙국가이고 전통적으로 사회주의권 국가입니다. 지금 사는 곳이 라파스 지역인데 고도가 3600미터로 백두산보다 높은 곳이에요. 집중치료실은 거의 없고 최근에 백신접종을 시작했는데 백신접종률이 굉장히 낮아요. 백신은 주로 중국이나 러시아 쪽 협조를 받고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속도도 더디고요. 얼마 전(3월 8일)에 지방선거가 있었는데요. 선거기간에는 코로나19 테스트도 안 했습니다. 최근까지 500명이던 확진자가 선거가 끝난 후 늘고 있습니다. 어제(4월 7일) 보니까 1천 명이 넘었더라고요. 지금까지 사망자는 1만 2천명 정도 되고요. 인접한 국가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등에 비해 굉장히 양호한 편이죠. 그런데 이게 과연 실제로 믿을만한 통계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거죠.
최근에는 브라질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다들 긴장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브라질은 코로나19 사망자를 묻을 땅이 없어서 오래된 무덤들을 파헤쳐서 새로운 시신을 묻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볼리비아는 브라질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브라질 변이가 들어온다고 해서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한편에서는 벌써 들어왔는데 쉬쉬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지속되는 프로젝트 사업 속에 코로나19 대응 사업 진행

 

팬더믹 상황에서 코이카 사업 자체가 쉽지 않을텐데 사업이 어떤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쉽지는 않죠. 코이카 사업은 여러 가지 형태로 진행되는데 그중 한국 국민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자원봉사단 활동은 거의 중단된 상태죠. 한국사무소에서는 그런 것들을 원격으로 해보려고 하는데 시차가 너무 많이 차이 나서 여의치 않고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사업들은 현장 사무소가 중심이 되는 사업들입니다. 예산 규모가 70억에서 80억 정도 되는 프로젝트 사업들이죠. 예를 들어서 병원사업, 젠더사업, 교육사업, 농업 관련 사업 등이 있습니다. 젠더 사업은 여성의 경제적 환경이나 요건을 개선해주는 사업 등이고요. 개도국의 경우 청소년들의 혼전임신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 것들을 어떻게 교육을 통해서 지양할 것인지 논의하고 추진하고 있고요. 그리고 옛날부터 진행되어온 농업 관련 사업들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볼리비아 사무소는 전체 인력이 스무 명 정도 되는데요. 그중에 한국인력이 열명 정도, 현지인력이 열명 정도 되고요. 대부분의 역량은 새로운 사업 발굴과 함께 기존에 있는 사업들을 진행하는 가운데 ‘코로나19에 어떻게 대응을 잘할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산을 좀 전용을 해서라도 코로나19에 대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학교가 거의 폐쇄되고 수업을 온라인으로 한다고 하지만 사실 온라인 수업이 거의 안되죠. IT는 여러 가지로 돈이 많이 드는 거니까요. 지방 같은 경우는 반반씩 열기도 하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를 예방할 수 있는 장비나 의약품 등이 거의 없으니까 그런 것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예방할 수 있는 장비들도 전 세계가 경쟁을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우리나라 정부는 나름대로 대응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있는 것들을 지원을 많이 해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 우루과이라운드 반대투쟁

 

코이카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2005년에 코이카에 입사했어요. 코이카가 올해가 30주년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15년 정도, 코이카 역사의 절반 정도를 함께했죠.
고등학교 때까지 수동적인 인간으로 살다가 점수에 맞춰 대학에 입학을 했는데요. 대학에 들어와서 내가 뭘 해야 되나 정체성에 혼란이 왔죠. 내가 이 세계에서 할수 있는 게 뭔가를 고민하다가 우루과이라운드 반대투쟁을 접하게 됐죠. 그때 농대 선배들도 많이 만났고요. 그 과정에서 ‘사회에 뭔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게 굉장히 필요하겠구나. 그리고 우리의 삶이 전체적으로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요. 그러면서 학생회 활동을 하게 되었죠. 그 이후 내가 배운 학문, 전공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죠. 그런 생각 끝에 내가 배운 것을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고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죠. 대학원 2년을 마치고 장교로 군대를 가려고 준비하던 중에 한겨레 신문에 난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대체 군 복무제도인 해외봉사요원 제도를 보고 ‘이거나 해볼까?’하는 마음에 지원하게 됐고 군대 대신 필리핀에 2년을 가 있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해외를 나가 본거죠. 대체복무를 하면서 많이 느꼈던 게 ‘세상에는 할게 되게 많구나’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대한민국은 젊은이들이 구심력으로, 안쪽만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몇 개 안 되는 기회를 가지고. 그런데 이게 원심력으로 가지고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있고, 보람 있는 일이 많겠더라고요. 당시 일본 친구들을 많이 봤는데요. 필리핀으로 공부를 하러 오는 한국 친구들은 대부분이 한국에서 자리를 못 잡아서 오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 친구들은 그 오지에까지 와서 의미 있는 공부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선진국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한 기회에 대해서 가능성을 갖고 나름대로 개척해가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고요. 또 해외에서의 생활이 저와 잘 맞더라고요. 그래서 대체복무 후 한국에 돌아와서 코이카에 입사를 하게 됐어요.
우루과이라운드가 굉장히 큰 터닝포인트였고 그 당시에 여러 가지를 하게 되면서 선배들과 나눈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고민들, 사회과학 책을 통한 학습 등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을 좀 뜨고 그랬던 거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시 생각해도 그때가 재밌었죠.”

 

“리스크를 안지 않으면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없는 거 같아요.”

 

해외에서, 개발도상국(이하 개도국)에서 코이카 활동을 하면서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 김식현 소장은 “리스크를 안지 않으면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없는 거 같다”며 웃는다.

“개인적인 리스크부터 현지 환경, 사업 진행에서 오는 리스크 등 실제로 리스크가 굉장히 많죠. 개인적인 리스크로는 기후가 다르다 보니 건강상의 문제도 있을 수 있고, 같이 온 가족들은 저만 보고 오는 거니까 가족들 케어도 해야 되고 아이들 교육의 문제도 있고, 아이들이 해외에서 오래 살다 보니 부모의 입장에서 한국말이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등을 계속 교육해야하는 어려움도 있고요.
코이카에 입사한 후 제가 험지를 많이 다녔어요. 처음에는 이라크(자인툰 부대 있을 때) 일 년 반, 아프가니스탄에 일 년 반 있었고, 베트남에 삼 년, 동티모르 삼 년, 볼리비아까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체를 보게되었죠. 우리가 책으로 봤던 미국도 있지만 현장에서 본 미국은 무지막지한 나라였습니다. 돈과 군사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인류에 대한 책임성은 거의 없는, 국가적 이기심만 갖고 있는, 위대한 나라보다는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을 많이 가지게 됐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속에서 활동을 어떻게 잘할 것인지 고민도 많았고요.
실제로 사업을 하다가 부딪히는 리스크 같은 경우는 계획대로 되지 않거든요. 한국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니 어쩌니 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만 여기는 그렇게 하면 하세월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리스크를 안으면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빨리 해결할 방법을 찾을 것이냐’가 굉장한 관건인데요. 이런 부분은 국가마다 정형화되어있지 않고 현장에서 많이 부딪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머리보다는 몸으로 부딪히면서 현지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들이 굉장히 중요한 거 같습니다. 개도국에서 일을 하다 보면 당연히 리스크를 안게 되죠. 그런데 리스크를 안지 않으면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없는 거 같아요.(웃음)”


어려움을 해결하는 대화, 더디가더라도 함께 가는 끈기

 

“코이카는 돈 버는 조직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거의 1조 예산을 가지고 있는 정부기관이거든요. 돈을 쓰는 조직이에요. 국민의 세금을 잘 써야하는 조직이에요. 주는 게 되게 쉬울 거 같지만 쉽지 않거든요. 한국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에 ‘너는 주고도 욕먹냐’ 이런 말이 있거든요. 밥을 사줄 때도 그렇거든요. 사줄 때 확실하게 사줘야지 괜히 어설프게 사주면은 밥 사주고도 욕먹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개도국에 와보면 주는 것도 경쟁이고 주는 것도 굉장히 많은 기술과 노하우가 필요합니다.
제가 개도국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개도국이 개도국인 이유는 자신들의 문제가 뭔지 정확하게 잘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화하고 소통을 하지 않으면 문제에 정확하게 들어가지 못해요. 피상적으로만 보면 해결이 나오지 않거든요. 현장에서 ‘너 문제가 뭐야’ 하면 다 문제라고 해요.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기자재도 없고, 뭣도 없고, 뭣도 없고 다 없다고 그래요. 그런데 다 해줄 수는 없잖아요. 그럼 어떻게 실마리를 찾느냐가 중요한 거니까, 어떻게 보면 이 과정이 지지부진하죠. 사람들과 소통을 많이 해야 하고 좀 늦더라도 더디 가더라도 같이 가야하는, 그런 끈기가 없으면 안되는 거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의 능력을 통합시켜 현지인들이 행복하도록 일으켜주고 떠나는 영원한 객(客)

 

문화차이와 사고방식의 차이로 인한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하는지 궁금해졌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도 다르고 일하는 방식도 다르고 자기가 만족하는 것도 다른 거죠. 뭔가를 해줌에 있어서 우리가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행복해지는게 중요한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봤을 때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고 상대방이 봤을 때 좋은 게 좋은 거거든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내가 봤을 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들어 어떤 건물을 짓는 사업을 했어요. 건물 외관도 삐까번쩍 지어놓고 실내도 잘해놨어요. 그런데 운영이 안돼요. 왜냐하면 그런 사업들은 소통하지 않고 우리식대로 한 거에요. 우리가 갑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주는 대로 받아라’라는 입장인 거죠. 그렇지만 어떤 사업은 한국사람이 봤을 때는 너무 어설퍼보이고 너무 현장화 되어있고 너무 지지부진하고 그렇지만 막판에 끝내고 났는데 그들이 그 사업에 대해 너무 애정을 가져요.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과 항상 토론을 했고, 그들의 업무로써 깨닫게 해 줬기 때문이거든요. 즉 전자는 우리가 그냥 떠먹여 준거고, 그러니까 오너십은 우리에게 있는 우리 사업이 돼버린거고 후자는 비록 겉모습은 험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과 토론하고 논의하는 과정을 거쳐 오너십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거죠. 우리가 보기에 부족해 보여도 그들의 문화와 사고를 인정하고 그들이 원하는 방식을 존중할 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랜기간 현장에 있으면서 대화를 통해 도달해야 할 결론은 자신들이 주(主)가 되어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그 속에서 개개인의 능력을 가지고 뭘 할 수 있는게 아니고 다양한 사람들의 능력을 어떻게 통합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개도국 사업은 특히나 혼자 할 수 없거든요. 어떤 분야에 어떻게 퍼즐처럼 사람들의 역량을 잘 취합을 할 것이냐가 핵심인 거죠. 현장에 우리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객이거든요. 우리는 그들을 일으켜주고 떠나고, 그들이 자기 거라고 생각하고 주인의식을 갖고 하는 사업들이 가장 중요한 거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삶에서 느끼는 보람

 

어려움 속에서도 활동을 계속하게 되는 힘 혹은 철학은 무엇인지 물었다.

“먼저 개인적으로 항상 새로운 문화, 새로운 세상,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코이카 사업이 저랑 잘 맞는 거 같아요. 두 번째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직업이라는 게 단순히 돈버는 것이 직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코이카가 월급을 많이 주는 회사는 아니지만 내가 하는 일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뭔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요. 또 내 자식에게 우리 아빠는 돈만 버는 사람이 아니고, 아빠가 하는 일은 좋은 일, 선한 일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도국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게 상당한 매력이죠.
해외에 2-3년씩 나오면 이게 중독이 돼요.(웃음) 봉사활동을 하는 입장에서는 누군가를 도와주러 간다고 생각을 해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막상 가보면 도와줄 게 없어요. 우리가 안 도와줘도 잘 살아요. 거기 가서 도와주러 간 사람이 도움을 받고 와요. 그런 걸 경험해보니 내 자신이 갱생이 되는 느낌이 들더군요. 마더 테레사 처럼 평생 봉사하며 산 사람이 있잖아요. 저는 그런 분들이 평생을 남을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살았으면 지쳤을 거고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건 자기가 좋아서 한 거에요. 그걸 통해서 행복을 느끼고 그걸 통해서 자기가 더 맑아지고 충족감을 느끼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어떻게 맨날 도와준다고 생각을 하고 살겠어요. 사람이 다 이기적인 게 있는데….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4℃의 물처럼 흐르고 있는 농업에 대한 고민

 

초심 지키면서 열심히 사는 선후배들을 보면 자랑스럽고 항상 미안한 마음이 크다는 김식현 소장은 아직 마음 속 깊은 곳에 농업에 대한 고민이 남아있다고 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졌다.

“곧 50이거든요. 지금 어딜 가겠어요. 그렇지만 제 마음 저 밑에는 항상 농업이 있거든요. 제 전공이고, 가장 머리가 플래시할 때 고민했던 것들이 그런 것이니까. 선후배들 중에 귀농한 분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켜줌이 고맙기도 하고요. 한편으로 나이가 들어도 내 목안에 가시처럼, ‘나는 이전에 가졌던 고민들을 어떻게 풀 것인가’하는 고민이 있죠. 4℃의 물이 가장 무겁다고 하잖아요. 밑바닥에는 그런 물이 흐르고 있는 듯, 20대의 고민들은 항상 제 안에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 결과가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죠. 저는 당분간 여기에 있을 거고 개도국에서 살지, 어디에서 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하는 일에 나름의 긍지가 있고 저 밑바닥에 항상 4℃ 물처럼 농업에 대한 고민이 항상 있다는게 지금의 제 모습입니다.”

보람을 느끼는 순간을 묻는 질문에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조국 밖의 인류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을 볼 때나 동시에 더디 가더라도 협력국가 국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일궈냈을 때이지 않을까요! 대학시절 가졌던 모두가 잘 사는 사회 건설의 글로벌 버전이 제가 하는 일인 듯하네요.”라는 답 속에 대학시절부터 고민하고 만들어간 선한 영향력을 지속하는 힘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