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조 9호세대 비화]아, 유신이 무너진다
서슬 퍼런 긴급조치9호가 오둘둘 사건으로
10일 만에 흠집이 나버리자 박정희 대통령은 격노했다. 물론 일반 국민은 박 대통령이 화낸 일은 고사하고 긴급조치9호 폐지를 주장하는 학생 데모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긴급조치9호를 위반한 사건을 알리는 것 자체가 긴급조치9호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신문의 1단짜리 기사나 행간을 읽는 기술이 필요하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걸 보고 바람이 부는 줄 알듯이 기사의 행간에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둘둘 사건 직후에도 '내공'이 깊은 사람은 서울대와 경찰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오둘둘의 충격파 '줄초상'
먼저 일간신문 구석의 인사란을 잘 살펴보면 짚이는 게 있다. 사건 직후 서울 남부경찰서장이 직위해제됐다. 남부서 정보과장과 서울시경 기동대장도 경질됐다. 공교롭게 이 즈음 서울시경국장과 치안본부장도 바뀌었다.
1974년 말 치안국이 치안본부로 개편되면서 초대 치안본부장의 영예를 차지했던 박현식 본부장이 취임 6개월 만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낙마한 것이다.
서울대에서는 한심석 총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3년 임기의 총장이 연임한 지 3개월 만에 사표를 낸 배경에 의문을 가질 정도의 사람은 어렴풋하게나마 사태의 전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국립대 총장의 목이 날아가고 경찰 총수에서 관할서 정보과장까지 줄초상이 났으니 원인 제공자인 학생들의 처지는 뻔했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지만 견디기 힘든 고강도 수사와 처벌이 따랐다.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사대생 박연호(현 광주교대 교수)-송병춘(현 한벗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 등의 고초는 상상 밖이었다. 상부선으로 복학생 유영표(현 매경바이어스가이드 대표이사)-유상덕(현 한국교육연구소장)에서 끊으려 했던 주모급 6인의 언약도 '매' 앞에는 도리가 없었다.
사대 쪽 핵이었던 박연호는 미리 짜놓은 도피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그는 "오둘둘 시위는 일반 데모와 달라 주동자가 중간에서 빠지기 어려웠다"면서 "주동자가 끝까지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시위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최근 회고했다.
박연호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신한무역(서울시경 대공분실을 지칭)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김근태(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까지 불게 되는 것이다. 그는 "김근태 선배까지 나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내가 보호하지 못했다"며 "그게 죄송스러웠다"고 말했다.
수사 당국에 의해 오둘둘 사건의 최고 배후로 지목된 김근태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검거되지 않아 결국 '공소 외'로 처리된다.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의 단초가 된
1971년 5월 '갈현동 모임' 이후 한 번도 수사망에 걸려들지 않은 셈이다(
554호 본 시리즈 제2화 참조, 그는 '갈현동 모임'이 있는 줄도 몰랐고 참석하지도 않았다고 최근 밝혔다).
박연호를 비롯해 김도연(문학평론가, 작고)-천희상(현 도서출판 세계인 대표) 등 오둘둘 현장 지도부 3인은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형기를 대부분 채우게 된다. 시위 사건 주동자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끝까지 복역시킨 것이 긴급조치 9호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들을 포함해 단순가담자까지 제적시켜
1979년
10-26으로 박 정권이 끝날 때까지 복학을 불허할 정도로 긴급조치9호는 가혹했다.
오둘둘 데모는 유신 이후 첫 학생시위인
1973년 서울문리대
10-2데모와 대비된다. 비슷한 점이라면 극도로 엄혹한 상황에 강경파 주도로 무모한 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회의적인 전망을 뒤엎고 시위를 성공시킨 점도 같다.
10-2데모의 경우 민청학련 사건, 오둘둘 데모의 경우 세칭 '명동성당 학생사건'과 같은 조직사건으로 이어진 점도 닮은꼴이다.
유신의 가을을 연 '10-2데모'
10-2데모 역시
1972년
10월
17일 '유신쿠데타' 이후 저항운동이 전혀 없던, 암울한 국면을 돌파한 학생운동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데모가 성사되기까지 서울대 운동권 내부는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그만큼 논란이 많은 거사였다.
1973년 서울대 4학년
70학번 그룹은 여름방학 때부터 '가을에 데모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논쟁을 벌였다.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 출신을 주축으로 한
10명 안팎의 멤버들은 경북 칠곡으로 농활을 가서 논의에 불을 지폈다. 이들은 학기중에도 보안 유지를 위해 장소를 바꿔가며 격론을 벌였다.
논란의 골자는 '투쟁론'과 '준비론'이었다.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 이 시점에 우리가 투쟁의 기치를 올려야 한다'는 게 투쟁론의 골자였고, '그랬다가는 그나마 남아 있는 역량마저 소진된다'는 게 준비론의 논거였다.
우선 4학년 내부에서 의견이 통일돼야 하는데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준비론자와 투쟁론자 사이에 서로 멱살까지 잡을 정도로 논쟁은 격렬했고, 양쪽은 5:5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다. 데모를 할 사람은 데모를 하고 안 할 사람은 후배를 기르는 쪽으로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투쟁론 쪽에 선 사람은 나병식(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총장)-정문화(작고)-정찬용(현 청와대 인사수석)-김병곤(작고)-강영원(현 대우인터내셔널 전무이사) 등이었다. 준비론 편에 섰던 이근성(프레시안 상임고문)도 강경파가 결심을 하자 투쟁론에 가세했다. 언어학과 정찬용은 "대학원에 진학해 만주-몽골어를 공부하려다 광주일고 동기인 나병식의 꾐(?)에 넘어가
10-2데모에 가담하고 민청학련 사건에까지 연루돼 감옥을 살았다"고 최근 회고했다(
2004년 2월 4일 관악민주포럼 강연회).
4학년 중심으로 준비팀이 구성됐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선배 복학생 그룹과 후배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학생 그룹 중 서중석(성균관대 교수)-유인태(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문우회 쪽은 준비론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후배 그룹에도 김효순(현 한겨레신문 편집국장) 등을 비롯해 신중론자가 많았다. 나병식 등이 선-후배 설득에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는 당시 투쟁론에 합류한 안양로(정치학과
68학번, 현 한강선원 원장)의 말을 들어보면 잘 알 수 있다.
"나병식 그룹이 선배들의 동의를 받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지요.
67-68학번을 잡으면 고려대-연세대-전남대-경북대-부산대까지도 연결된다는 걸 알았던 겁니다. 그러나 그때는 나 자신도 회의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참여하면 그 네트워크가 작동될 것이라고 기대할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다만 내가 참여함으로써 학내의 적극적 반대론자들이 소극적 반대로 돌아선 효과는 있었지만...".
"유신도 무너뜨릴 수 있다!"
부문회(復文會, 문리대 운동권 복학생 모임) 회장인 안양로가 합세하고 문리대 학생회장 도종수(현 나사렛대 교수)가 동의하자
10-2거사는 비로소 힘을 받게 된다.
72학번 강구철(대전에서 재야활동, 작고)이 현장 동원에 나선 것도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었다.
'유신세대'인
72학번 가운데는 국사학과 정동영(열린우리당 의장)도 있었다. 정치적 감수성이 예민한 1학년 때 유신쿠데타라는 엄청난 정치적 좌절을 경험한
72학번 그룹은 "형량을 합하면
100년은 될 것"이라는 우스개가 나올 정도로 학생운동에 깊이 휘말리는데, 이들은 지금도 마당(
72학번 서울대 운동권 출신이 정례적 으로 모이는 레스토랑 상호를 딴 이름)이라는 친목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1975년
4-3시위를 주동하는 박우섭(현 인천 남구청장)-박인배(현 민예총 기획실장)와 오둘둘 시위 주모자 김도연-김정환(현 한국문학학교장, 시인)-황선진(현 마리교육생활협동조합 대표) 등이 모두
72학번으로 마당 회원이다.
정동영은
10-2데모 때 현장에서 체포돼 구류
30일을 받고 학교에서는 무기정학 처분을 받는데, 그는 당시의 처절했던 시위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순간, 어디선가 두 발이 번개처럼 날아와 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일어서려는 찰나 사복경찰 한 명이 복날 몽둥이에 얻어맞은 개 모양으로 나동그라진 내 등을 타고 찍어누르는 것 아닌가. 그의 손이 내 머리를 낚아채는 순간, 왼쪽 손목에 채워져 있던 시계줄이 풀어진 채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내 손목에 채워주셨던, 아버지의 체온이 스며 있는 시계. 그 시계까지 한 뼘이 모자랐다. 시계에 다가가려고 기를 쓰는데 군홧발 하나가 내 손등을 으깼다. 동시에 다른 한 발이 스테인리스 줄이 달린 시계를 공중으로 걷어차버렸다. '어, 내 시계... 아버지!' 나는 경찰서에 끌려가면서도 연신 아버지를 외쳤다."(정동영 등 지음, [새벽을 엿본 마로니에 나무] 중에서)
어렵게 성사된
10-2데모는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둔다. 경찰이 교내에 진입하지 않고 밖에서 교문을 봉쇄하는 작전을 펴 초기 진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학생 수는 불어나 서울문리대 사상 초유의 대규모 시위대가 조직되고, 주모자들이 모두 도피할 시간을 버는 가외소득까지 얻는다. 주모자가 현장에서 한 명도 안 잡힌 예는 유신치하 데모사에서 유일무이하다.
애초 거사팀은 시위를 오래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선언문을 작성했던 이근성 등도
'3분 작전'을 세울 정도였다.
'3분 작전'이란 선언문이라도 다 낭독할 수 있게 3분을 버티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이근성은 애초에 작성한 선언문을 줄이고 줄여 3분 분량이 되게 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나 실제로 현장에서는 시간이 남아 선언문을 몇 차례 반복해서 낭독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10-2데모의 학생운동사적 의의는 단순한 시위 성공만은 아니다. 우선 투쟁론과 준비론으로 양분됐던 서울대 학생운동이 통일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은 준비론도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섣부른 투쟁은 그동안 비축해온 역량과 성과를 일거에 무효화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준비론자들이
10-2데모를 단순히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결사적으로' 저지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들도
10-2데모의 성공을 보면서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된다. "유신도 무너뜨릴 수 있다!" 그 뒤 벌어진 법대-상대 시위와 동맹휴학 등은
10-2데모에 반대했던 세력의 주도로 더욱 뜨겁게 전개된다. 그 과정에 학생들은 바위와 같은 유신체제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다.
도피하면서
10-2데모의 파장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주모자들은 불씨가 타대학으로 쉽게 옮겨붙지 않자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11월 들어 생각지 못했던 구세주(?)가 나타났다. 경북대와 이화여대였다. 5일 지방대에서 가두진출에 성공하고,
12일 여대생들이 데모에 나서자 고려대-연세대 등 서울의 주요 대학도 더 이상 얌전히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화여대의 시위는 경찰의 무리한 수사가 원인이었다.
10-2데모 당시 경찰은
180여명을 연행해
30여명을 무더기 구속했다. 서울대도
97명을 대량 징계했다. 주모급을 놓친 경찰은 당시 연립주택 한 채 값에 해당하는 현상금 1백만원과 1계급 특진을 걸고 이들을 수배했으며, 수배자 가족까지 연행해 조사를 벌였다.
주모자의 여동생 중에 이화여대생이 있었다. 조사를 받은 여학생이 경찰서에서 받은 갖은 성적 모욕을 채플 시간에 폭로해 학생들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시위 때마다 김옥길 총장이 교문에 드러누워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차마 스승을 타고 넘어갈 수 없었던 이화여대생들도 이 날만큼은 진짜 밟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화여대생 데모 후 대학가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전 대학이 궐기하고 가투가 확산되면서 불길은 사회 각계로 퍼졌다. 숨죽이고 있던 종교계-언론계가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12월 4일 장준하 등의 주도로 개헌청원 1백만인 서명운동 발기대회가 열리는 것이다.
견디다 못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12월 7일 구속 학생 전원 석방과 처벌 백지화를 민관식 문교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민 장관은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10-2데모 관련 학생에게 징계조치를 취했던
10월
12일자로 소급해서 전원 징계를 철회한다고 밝혔다. 뒤늦게 검거됐던 나병식 등 구속자들도 이날 오후 일제히 풀려났다.
예고된 응징 '조직사건'
박 정권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학생들은 고무됐다.
10-2데모 당시 투쟁론을 폈던 강경파조차 "데모 중에 그렇게 어려운 데모는 처음이었다"며 "사실 그때는 너무 두려웠다"고 최근 실토할 정도였다. 어려웠던 만큼 성과도 컸던 셈이다. 그 후 펼쳐진 상황은 반대파에게조차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민청학련이 조직되는 결정적 토대도 바로
'10-2쾌거'였다.
1975년 긴급조치9호에 정면 도전한 오둘둘 데모도
10-2데모에 버금가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다른 것이라면
10-2데모 때는 박 정권이 두 달 만에 손을 들었지만 오둘둘 때는 더욱 가혹하게 탄압했다는 점이다. 오둘둘 관련자들은 박 대통령 생전에 복학은커녕 형 감면조차 받지 못하게 된다.
10-2데모 때와는 달리 오둘둘 데모가 휩쓸고 간 관악캠퍼스는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둘둘 데모를 먼산 불 보듯하면서 은인자중하던 또 다른 '준비론자'들만 보이지 않게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사건이 벌어지고 일주일째인 5월
29일, 법대
73학번 박석운(현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장)은 아무 생각 없이 학교에 나갔다.
그런데 심상치 않았다. 교내에 '새(사복경찰)'들이 유난히 많았다. 재빨리 안테나를 가동해 이유를 알아보았다. 아차, 김상진 열사
49재!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양 멍한 기분이었다. 데모는 고사하고 기억도 못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마른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굵은 우박이 후두둑 떨어졌다. 우박을 피하려 황급히 건물 현관으로 내달리는 그를 끝까지 쫓아오는 상념... "아, 하늘이 우는구나!" 박석운이 학생운동사를 다시 쓰기로 마음먹는 순간이었다.
이즈음 정보기관은 또 하나의 '대어'를 낚고 있었다. '큰 사건 뒤를 조심하라!' 대규모 시위 후에는 대형 조직사건이 따르는 학생운동사의 소름끼치는 공식이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었다.
4-19혁명 뒤의 민통련 사건,
6-3사태 뒤의 민비연-불꽃회
-1차인혁당 사건,
10-15위수령 뒤의
NH회-검은
10월단 사건,
10-2데모 뒤의 민청학련
-2차인혁당 사건.... 오둘둘 데모를 단죄하기 위한 역음모, '제2의 민청학련 사건'이 시작되고 있었다.
신동호 편집장
hudy@
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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