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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2004.03.12] [긴조 9호세대 비화] (11)'페다고지'의 전사들: 오둘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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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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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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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조 9호세대 비화] (11)'페다고지'의 전사들

 
오둘둘 사건 (하)

1971년 4월 14일 오후 1시 40분경 서울사대 앞을 지나던 군용 세단에 돌 몇 개가 날아든다. 교련반대 데모를 하던 사대생들이 장난삼아(?) 던진 이 돌은 뒤이어 닥칠 엄청난 사태의 신호탄이 된다.

무장경관 서울사대 난입사건.

학생운동사에 전무후무한 이 사건으로 서울사대는 새롭게 태어난다. '예비교사'로서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사대생들이 마침내 떨치고 일어나 학생운동 무대에 본격 데뷔하기 때문이다. 장차 '선생님'이 되어 제자들의 데모를 막아야 할 처지였던 서울사대생들은 이날 배움의 터전이 철저히 유린되는 현장을 목도하고 '새로운 교육학'에 눈뜨는 것이다.

돌을 맞은 군용 세단은 대통령 일행을 에스코트하는 차량이었다. 학생들은 세단이 지나간 뒤 경호차량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다.

중문과 정문을 통해 70여 명의 무장경관이 교내로 진입했다. 학생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고, 경찰은 전광석화처럼 전열을 갖춰 학생들을 향해 포진했다. 일촉즉발. 마치 발포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그, 사대 없애버려!"

그 팽팽한 긴장감을 깨고 누군가가 중문을 통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서울연구개발단지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용두동 서울사대 앞을 지나던 중이었다. 본관을 향해 걸어가던 박 대통령은 황망히 뛰어나온 서명원 학장 앞에 멈춰 섰다.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왜 이래?"

딱 한마디. 그리고는 몸을 홱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이를 신호로 서울대 사대와 가정대 캠퍼스는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무장경찰이 학교를 이 잡듯이 뒤지면서 대규모 '체포작전'을 펼친 것이다. 경찰이 붙잡힌 학생을 포로 취급하는 광경을 본 사대생들은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날 경찰은 사대생 59명을 연행했다. 박 대통령이 뒷날 국무회의에서 "그, 사대 없애버려!"라고 말할 정도로 진노한 사건이다.
'대통령 경호차 투석'과 '무장경관 학원 난입'이라는 두 요소가 맞물린 이 사건은 학생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피압박자를 위한 교육학' 즉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가 국내에 알려진 것이 이 무렵이며, '행동하는 교육학' '행동하는 교사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 또한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무장경관 서울사대 난입사건은 향후 학생운동권과 교육계에 휘몰아칠 'A급 태풍'의 주의보였다.

정치권으로까지 비화된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사대에는 학생운동이 조직되고, 그 세력은 4년 후인 1975년 오둘둘 사건의 최강 진용으로 발돋움한다. 오둘둘 사건으로 가장 많이 제적되고 구속된 그룹이 사대였다. 그리고 오둘둘 사건을 주도했던 사대생 상당수는 14년 후 조직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주축세력이 된다.

이들이 펼치는 '교육 민주화 운동'이라는 긴 여정의 출발점에 세 사람이 있었다. 서울사대 68학번 채광석(시인, 작고), 69학번 유상덕(현 한국교육연구소장)-박부권(현 동국대 교수)이다. 무장경관 난입사건 때 이들 '사대 트리오'는 교내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이슈는 교련 반대였다. 대의원회 부의장이던 유상덕은 고시 공부를 위해 사퇴한 의장직을 이어받아 교련반대투쟁을 주도하고, 박부권은 회장이 지도력을 잃은 학생회 기능을 대신하고 있었다.

강철대오 '탈춤패-문학패-야학패'

채광석은 서울대 각 단과대학에 포진한 대전고 동문 운동권과 깊이 '내통'하고 있었다. 안양로(현 한강선원 원장)-심지연(현 경남대 교수) 등 문리대 운동권 핵심 멤버가 그의 대전고 동기다. 그는 당시 학생운동 최전선의 동향과 정보를 사대에 이입시킨 '사대 학생운동의 조상'이라고 할 만하다.

서울대 운동권에서는 '사대 채광석'을 '법대 조영래'에 비유하기도 한다. 1970~80년대 사회운동에 누구보다 치열하 게 참여했고, 그 방식이 매우 다이내믹했으며, 그 영향이 깊고 넓은 것이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액티브했지만 아무에게도 욕을 먹지 않은 인품이나 40세 전후에 아깝게 요절한 점도 같다. 조영래가 보수적인 법조계와 그 주변을 뒤흔들었다면 채광석 역시 그에 못지않게 보수적인 교육계와 문단 등 문화적인 부문으로 운동을 확장시킨 점도 마찬가지다. 노동자 박기평이 혁명 시인 박노해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채광석이라는 배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상덕은 1981년 초 YMCA중등교육자협의회 창립, 85년 민중교육지 사건,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조직, 86년 교육민주화 선언, 89년 전교조 설립 등 '교사운동'의 시작부터 끝까지 중심에 서는 인물이다. 그는 1985년 성동고 교사로 재직하다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파면된 뒤 1999년 15년 만에 교단에 복귀하고 DJ정부 시절에는 대통령 자문 새교육공동체위원회 위원, 참여정부 아래서는 교육혁신위 상임전문위원을 맡게 된다.

1971년 무장경관 난입사건 당시 박부권은 학생회 학술부장으로 지도부가 마비된 학생 공조직을 사실상 대표하고 있었다. 그는 채광석-유상덕과 함께 당시 대학가를 강타한 교련반대 데모를 조직하고 결행한다. 그 해 10-15 위수령 후 제적된 그는 결핵성 늑막염 때문에 군에 가지 않고 있다가 민청학련 사건에도 연루된다. 그 바람에 두 사람보다 1년 일찍(1973년) 복학해 졸업, 오둘둘 사건에는 빠지게 된다. 그 뒤 그는 교육학자로서 길을 걷다가 노무현정부 출범 때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교육분과위원으로 참여한다.

서울사대가 오둘둘 사건에 깊숙이 연루되는 씨앗은 이들 '사대 트리오'가 1974년 조직하는 야학문제연구회(야문회)였다. 먼저 복학한 박부권이 하일동 한 교회의 교육관을 빌려 야학을 개설한 것이 그 시작이다. 당시 사대생이라면 야학을 하지 않는 학생이 거의 없었는데 그는 직접 야학을 하면서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학생들 형편이 워낙 어려운 데다 나이가 많아 3년을 붙잡아두기가 곤란한 현실이었죠. 수업기간을 단축하고, 이를 위해 커리큘럼을 새로 짜는 등 만만치 않은 작업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이런 일이 다른 데도 있을 것이다, 체계적으로 연구를 해보자고 해서...."

1974년 가을 채광석-유상덕이 복학하자 박부권이 이들과 함께 만든 것이 바로 야문회다. 서울사대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이념서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오둘둘 데모의 실행 조직은 문리대 중심의 '탈춤패' '문학패'와 더불어 사대의 이 '야학패'가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셈이다. 물론 문리대 쪽 연결고리는 ASP 출신 복학생 채광석-유상덕이었다.
사대쪽 일선 그룹의 지도부는 야문회 회장인 교육학과 73학번 박연호(현 광주교대 교수)였다. 역사학과 73학번 천희상(현 도서출판 세계인 대표)과 함께 현역 그룹으로는 가장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던 그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니던 그는 채광석-유상덕 등의 요청으로 야문회 회장을 맡았고, 역시 그들의 권유로 오둘둘 데모에 적극 나서게 된다. 박연호의 말을 들어보자.

"김상진 할복 후 두 선배가 굉장히 충격을 받았지요. 조선일보사 옆 경호다방에서 그들을 만났는데 나는 '죽을 것까지 있느냐. 투쟁해야지'라고 말했습니다. 선배들은 그런 나를 나무랐습니다. 같은 대학에 적을 둔 학생으로서 그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행사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것이었죠. 그때 이미 준비가 되고 있었던 셈이지요."

숨막히는 H아워의 상황

박연호는 이즈음부터 '총대'를 메고 강경하게 일을 추진한다. 졸업한 박부권이 야문회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 "아무도 가로막지 않는 권력을 너희가 가로막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지만 야학 문제도 거기에 상응하는 가치가 있지 않으냐"며 설득해도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천희상도 마찬가지였다. 신일고를 다니다 집안이 어려워 그만두고 검정고시로 사대에 들어온 그 역시 아르바이트로 학업과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긴급조치9호로 시위 준비가 주춤하자 "하기로 했으면 하면 된다"며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상황론에 대해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이 깨지지만 바위도 더러워진다"며 정면돌파론을 폈다. 뒷날 운동권이 분화하면서 '사구체 논쟁'을 벌일 때도 "독재는 부수면 되고 민주주의는 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말 연습이냐"라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당시 사대의 의식분자들은 '족보'는 달라도 대부분 야문회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대 교지인 [청량원] 계열의 천희상은 준회원이었고, 흥사단아카데미 계열의 교육학과 73학번 송병춘(현 한벗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은 정회원이었다. 송병춘은 '오둘둘 공범' 중에 유일하게 뒷날 노동운동에 헌신하다가 그동안 포기했던 학업을 계속해 1998년 졸업장을 받고, 40대 후반에 접어든 2001년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입지전적인 삶을 산다.

지리학과 72학번 박성규(현 도서출판 아침이슬 대표) 역시 향토개척단 계열이지만 야문회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그는 4-3데모 이후 제명-수배된 상태라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농대와 채널을 갖고 있어 오둘둘 사전 모의에 깊숙이 참여했다.

오둘둘 집회의 성격은 '김상진 열사 추도식'이었다. 가면극회 등 인문대측이 준비하는 진오귀굿과 만장, 조사, 조시 등은 추도식 또는 장례식을 의미했지만 사대측이 담당한 유인물 제작과 인원 동원 등은 시위를 겨냥한 것이었다.

인문대 쪽에서는 가면극회 장만철(예명 장선우, 현 영화감독)이 준비 책임을, 문학회 김도연(문학평론가, 작고)이 사대와의 연락 책임을 각각 맡아 장례식 준비를 해나갔다. 5월 중순쯤 모든 역할 분담이 마무리됐다. 조시는 이미 김정환(현 한국문학학교장, 시인)이 써서 김도연에게 넘겨준 상태였다. '벌거벗은 함성이 이제 들려오리라/4월, 오, 노란 개나리 겁 없이 피던 날/친구여! 네가 버린 것은 생명이 아니다'라는 김정환의 조시는 당시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린 걸작으로 평가된다.

진오귀굿의 여자무당역인 만신(萬神)은 연성수(현 두레생활문화원장), 상주는 정해일(사회학과 72학번, 문학회)이 각각 맡았다. 황선진(현 마리교육생활협동조합 대표)은 장구, 이지현(현 미국 거주)은 꽹과리를 치기로 했고 정성현(현 도서출판 청년사 대표)은 요령을 잡기로 했다. 조시는 작자인 김정환이 직접 낭독하기로 했다.

사대 쪽에서는 복학생 채광석-유상덕이 자금을 마련하고, 정은교(국어교육과 73학번, 현 전교조 편집실장)는 조사 작성, 천희상은 대의원 접촉, 박연호는 시국선언문 작성을 각각 담당했다. 집회에 사용할 마이크는 정광서(수학교육과 74학번, 현재 연변에서 목회활동)가 준비했다.
사대팀은 5월 21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송병춘의 집에서 유인물 인쇄 등 모든 준비를 마쳤다. 관악캠퍼스와 가까운 노량진동의 송병춘 집은 야문회 세미나를 하거나 시위를 준비하는 데는 더없이 좋은 아지트였다. 이 때문에 송병춘은 오둘둘 데모의 모든 준비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복학생 그룹의 지도로 사후 수습책도 논의됐다. 원래 시위 현장에서 주동자는 분위기를 띄운 뒤 빠지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사대팀은 달랐다. '죽은 사람도 있는데...' '감옥이 대수냐'라는 논리가 지배할 정도로 순수하고 격앙돼 있었다. 하지만 잡혀가면 매를 맞게 되고 매에는 장사가 없어 많은 사람이 연루될 수밖에 없다. 거사일 직전 준비팀은 인문대 쪽에서는 유영표(현 매경바이어스가이드 대표이사)와 장만철-김도연, 사대 쪽에서는 유상덕-박연호-천희상 등 6명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했다.

박 정권을 향한 통렬한 일격

D데이인 5월 22일. 오둘둘 전 과정을 조율해온 유영표는 가슴을 죄며 학교에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H아워를 한 시간여 앞둔 11시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첩보를 접했다. "오늘 데모가 있을 것 같다"는 기관원과 교직원의 대화를 엿들은 것이다. 하지만 엉뚱한 그룹을 언급하는 것을 확인하고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현역 일선 그룹은 유인물과 만장, 플래카드, 마이크 등 시위용품 준비를 마치고 1호관과 그 주변에 대기하고 있었 다. 복학생 그룹은 쪽지를 준비해 대형 강의실에 분산 배치됐다.

이들은 강의가 끝나기 10분 전쯤 김상진 추도식 집회가 있음을 알리는 쪽지를 앞으로 돌리고는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곧이어 강의가 끝날 무렵 인원 동원을 맡은 사대생 그룹이 강의실에 유인물을 뿌렸다. 26동 대형 강의실은 박연호, 서양중세사 강의실은 천희상, 8동 강의실은 송병춘이 각각 맡았다.

정오 무렵 각 건물에서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다. 복학생 그룹이 각층 계단 중간에 위치한 화재 비상벨을 누른 것이다. 강의를 마치고 복도로 쏟아져나온 학생들은 영문을 모른 채 웅성거리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 시간 아크로폴리스 광장. 비상벨을 누르고 건물 밖으로 나와 멀찍이 상황을 지켜보는 유영표는 초조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사복형사와 교직원은 합쳐 봐야 열댓명 정도로 파악됐다. 데모 조짐만 있어도 교문 밖에 대기하던 경찰 기동대도 오늘은 오지 않았다. 상황 발생 후 기동대가 출동하는 시간은 1시간 정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모이지 않는다.

바로 그때 중앙계단 앞으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김도연과 박연호가 '의로운 죽음, 암장이 웬말이냐'라는 플래카드를 펴들고 나서는 순간 이지현이 두드리는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것은 학생과 기관원 모두였다. 아크로폴리스는 갑자기 몰려든 학생과 기관원의 난투장으로 변했다. 시위 준비팀과 무관했던 박원순(현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최명규(현 방송대 방송제작부장) 등 1학년들까지 뛰어나와 기관원들의 폭력에 대항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 정해일은 읽으려던 장례선언문을 빼앗겼다. 마이크를 준비한 정광서의 도움으로 김도연이 겨우 장례선언문 낭독을 했고, 김정환이 조시를, 천희상이 조사를, 박연호가 반독재선언문을 읽었다. 그 사이 아크로폴리스에는 1,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전세가 완전히 역전됐다.

서울시경 기동대가 도착하기까지 1시간. 진오귀굿 등 준비한 장례의식을 치를 수 없는 상황에서 집회 주도권은 사대팀으로 넘어갔다. 기관원들의 결사적인 저지를 육박전으로 퇴치해 대오를 정비한 군중은 자연스럽게 시위대로 변했다. 박연호-송병춘 등 사대팀이 500여명을 이끌고 교문으로 진출했다.

데모할 상황도, 조건도, 자원도, 조짐도 없는 듯 보이던 5월 22일의 서울대 시위는 학생운동사의 기념비적 '개가'였다. 민청학련 관련자에게 최고 사형을 선고한 공포 분위기와 베트남 사태 직후의 안보 광풍, 그것도 모자라 모든 민주세력을 입조차 뻥긋하지 못하게 한 긴급조치9호가 발동된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터진 오둘둘 사건. 박정희 정권에 대한 '관악 전사'들의 통렬한 일격이었다.

절대 데모를 못하게 2중 3중의 안전장치를 했던 박 대통령은 대경실색했다. 긴급조치9호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대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의 진노가 하늘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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